그때 그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목숨을 걸어야 할 슬픔 앞에 피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수도꼭지에서 새는 물은 고쳐서 막을 수 있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를 고개 쳐들고 직면했다가는 실컷 젖기만 할 뿐이다. 비를 멈출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일단 피하기로 했다. 그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행위가 TV전원 버튼을 켜는 일이었다. 알아서 이야기가 이어지고 황당했다가 즐거웠다가하는 그 세계에 정신을 맡기면 더이상 우울해질 일도, 슬퍼지지도 않았다. 쉽게 웃고, 쉽게 울 수 있는, 대체된 TV의 세상. 방송중이든 종영했든, 매일 저녁 괜찮아보이는 프로그램들을 찾아 보고 또 봤는데, 그 과정에서 잊지 못할 몇 개의 최애 프로그램이 있다. 그중에서 단연 가장 소중한 프로그램은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2015)” 다. 이 작품은 내가 알고 있는 드라마 중 몇 안되는, 최고의 엔딩 드라마다. 거대한 시청률을 등에 엎고 막판에는 황당하거나, 식상한 엔딩을 많이 봐왔기에, 매회 이 드라마는 어떻게 끝나려고 이러지? 기대와 걱정이 가득했던 순간들이 기억난다.
주요 가족의 가장인 '한정호(유준상)'는 대대손손 1류 집안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유명 로펌 대표 법조인이다. 한정호의 고등학교 졸업반 아들 한인상(이준)은 가난하지만 똑똑한 서봄(고아성)과 하룻밤으로 예상치 못한 아이를 가지게 된다. 일반적이라면 집안 격차를 극복하는 노력끝에 집안의 인정을 받고 결혼하거나, 다툼 끝에 독립으로 끝날 것 같은 스토리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곳에서 특별한 역할이 가세한다. 바로 한정호의 집안에서 수년간 일해온 ‘을’들이다.
한정호의 집은 대대손손 이어온 한옥과 입식 구조를 접목한 저택이다. 높은 대청마루와 한옥의 단정함이 어둡고 모던하게 깔려있는 집안에는 굵직한 직선의 묵직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 자체로 이 드라마 범상치 않을거라는 걸 예고한다. 이 곳에서 답답할 정도로 단정한 유니폼을 입고 일하고 있는 집사, 가정부, 비서, 가정교사 등등 인물이 있다. 1류 가문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한 이 집안이 실질적으로 굴러가도록 유지해온 사람들이다. 한정호는 결코 이들에게 폭력적이거나 모멸감을 주는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뿌리깊게 박혀있는 계급의식과 차별적 태도는 위선적이다.
그런데 당돌한 고등학생 며느리 ‘서봄’이 집에 들어온 이후, 집안에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약간의 소동 끝에 저택에서 살게된 '서봄'은 차분하고 영리한 방식으로 집안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연대한다. 직원들은 서봄을 통해 4대 보험, 추가 근무 수당, 근무조건 개선과 같은 매우 구체적인 노동 복지에 대한 말들을 처음 꺼낼 수 있게된다. 과도한 정의감, 감정적 투쟁과 선동 대신, 현실적 고민들과 이성적 판단, 연대의 고리들이 하나씩 숨겨져있던 관계들을 풀어낸다. 그동안 화면 배경에서 일하는 사람이거나, 불쌍한 존재로 그려졌던 역할들이 각자의 개성과 현실적 감각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 과정에서 인물들 스스로 깨닫고 배우기도 한다. 잔잔하고 따뜻한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실천에 옮긴다. 서봄과 한인상 부부의 가출을 시작으로 (가출해서 '서봄'의 본가에 정착한다.) 직원들은 차례차례 저택을 떠난다.(퇴사한다.) 아들과 며느리, 손주, 자신의 모든 것을 맞춰주던 비서와 가정부까지 떠나고, 결국 큰 저택에는 아내 최연희와 한정호만 남게 된다. 그리고 아내도 결국, 비교 우위를 느낄 사람도 떠받들어주는 대상도 없는 집안을 견디지 못해 짐을 싸고 떠난다.
드라마의 엔딩은 가장 잊지 못하는 장면인데, 서봄의 본가 근처에 빌라 한 동에 함께 모여살기를 택한 (과거)한정호 집안의 사람들은 서로의 대소사를 챙기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빛과 웃음, 여유와 따뜻함이 넘치는 빌라는 가족의 또 다른 형태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거대한 한정호 저택풍경. 어두운 기운이 짙게깔린 집안에 유일하게 남은 한정호는 거대한 복도에서 권위적으로 크게 외치고 명령한다. 신규로 채용된 직원들이 이전보다 강화된 규칙을 준수하면서, 유니폼을 입고 정렬해있다.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바뀐 기분. 이미 외롭고 혼자되었음에도 속물적 위선을 벗어버릴 수 없는 한정호만이 그의 딱한 세계에 남았다. 거대한 감옥처럼, 공허한 철장처럼 보이기도 하는 저택 가장 높은 곳에 홀로 선 그의 악다구니에 가까운 외침은 드라마 마지막회에 가까워서야, 드라마 전체의 의도를 깨닫게 되는 시청자에게 많은 말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버티고 이겨내는 가운데, 진짜 삶이라 부를 것들의 가장 기본 조건은 바로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스스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모자라고 저것을 저렇게 했어야했고 점점 가능성보다 익숙하게 쌓아온 것들을 돌아보는 시점에 답답함이 찰 때 드라마의 엔딩을 떠올린다. 그리고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가느냐하는 것. 하지만 아무래도 그러니까 다 괜찮다는 식의 자족은 어려울거 같다. 내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도 역시,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니까. 잊지말아야할 것은 결국 내 실천과 행동의 목표와 가치가 무엇이냐를 잊지 않는 것. 정리되지 않는 저녁, 그 명확한 하나만 잊지 않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