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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y Jul 19. 2016

[과거]"처음"이야...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처음이야"라는 말을 몇 번이나 썼을까. 하긴 재방송도, 되돌이표도 안되는 인생사에서 아마 대부분의 일들이 처음일테니까. 생각보다는 더 많이 입술로 혹은 머리로 이야기했을 거다. "처음이야"


나는 어떤 단어를 발음할 때 느껴지는 감각과 그 단어의 뜻이 비슷한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새싹", "병아리"라고 발음할 때 느껴지는 따스하고 앳된 기운은 어떤 것의 '어린 상태'를 뜻하는 이 단어의 뜻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책"도 그렇다. 힘주어 "책"라고 발음하면, 'ㅊ'에서 오는 거친 무게와 'ㅐ'모음이 주는 연결의 느낌, 그리고 'ㄱ'이라는 글자 모양새의 단호함과 흐르는 모양이 평소 생각했던 "책"이라는 집합명사의 이미지와 참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 '처음'이라는 단어는 발음할 때마다, 그 모양새를 살펴볼 때마다 이걸 어떻게, 뭐라고 해야하나. 평소 생각했던 '처음'이라는 단어의 뜻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할 말이 없어진다.


보통 '처량하다', '처연하다' 등등으로 쓰이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뭔가 혼자만의 쓸쓸한 느낌을 머듬은 '처'라는 글자와, 이 느낌을 미처 다 흘려버리지도 못하고 꾹 닫혀버린 듯한 '음'이라는 글자는, 우리가 보통 "처음이야"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시작의 설렘, 출발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이라는 발음과 '처음'이라는 단어의 뜻은 정말 안어울려. 2014년 어느 날 이전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때는 바야흐로 여름날.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욕실에서 물을 받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나도 처음이야. 미안해."   

  그날 내가 얼마나 어설펐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고, 순수했고, 소중했다. 하지만 나는 대단히 거칠고 서툴고 두려워했다. "미안해, 미안해..." 몇 번이고 말했는지 모른다. 아, 하지만 매정하게도 욕실을 가득채운 그 울음 소리는 나를 한없이 더 깊은, 고독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애애애애~~~앵!!!!!"


  산후조리원에서 돌아와 태어난지 2주된 딸을 목욕시키는 날. 온도계까지 동원해서 물 온도를 맞추고 높이를 조절하고 입김만 불어도 뒤집힐(?) 것 같이 고개도 못가누는 신생아를 물에 집어넣었다. 겨우겨우 붙어있는 초미니어쳐 크기의 손과발, 목과 다리, 머리와 눈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이의 여린 피부 위로 내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팔뚝크기만큼도 안되는 것 같은 아이의 몸을 손상없이(?) 씻겨야한다는 그 부담감이란. 분명히 가르쳐준대로, 글로 배운대로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애애애애애애애애앵~!!!!" 울어제끼는 이 생명체. 그녀 앞에서 나는 처.음. 이라는 단어의 무게와 마주했다.


  첫 직장도, 첫 연애도, 첫(?) 결혼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완전한 객체이면서도 완벽한 일부분인듯 나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있는 존재. 이 존재가 주는 낯섬과 두려움은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치를 뛰어넘은 전혀 다른 세계,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두 개의 달이 뜨는(무라카미하루키, <1Q84> 참조!) 다른 세계로 빠져들어서 비슷해보이지만 전혀 같지 않은 길을 마주하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특히 나의 경우에는 그 충격이 더 심각했는데 그건 결혼 전 나의 상태(?)와도 관련이 있다.




 결혼 전 나는 집안일, 부엌일과는 전혀 친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설거지가, 빨래가 쌓여도 전-혀 불편함을 몰랐다.(그래서 엄마가 자취집에 올라오실 때마다 혼났다.) 요리도 마찬가지. 아니, 먹으면 없어질 것에 왜 그렇게 정성을 쏟는지 모르겠다며 부엌은 거의 근처에도 안갔다. 누구는 뭐 결혼하고 나면 그래도 좀 달라진다는데, 나의 이런 집안일 무감증은 유부녀가 된 뒤에도 그닥 호전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 믿고 살아주는 남편에게 미안해서 억지로 죽지 않을만큼의 요리, 욕 안먹을만큼의 청결상태만 겨우 유지하며 살아가던 나였는데. 이번에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얘는 그동안 내가 기꺼이 감당(?)해온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기에는 너무 연약하고 작고, 소중하다.


  매일 반복되는 청소(신생아 호흡기는 소중하니까), 요리(이유식은 해야하니까)는 물론 목욕, 빨래, 설거지 등등 이 작은 존재로 인해서 배 이상으로 늘어난 모든 집안일을 해내야하는 상황. 익숙치 않은 일들을 갑작스럽게 해내야하는 나의 육체는 한없이 어색하고 낯설어했다. 아기는 원인을 모르고 울어제끼고(가끔 웃어준다.), 집안일은 익숙치 않아서 느리고 그래서 더 힘들고, 그런데 할 일은 자꾸만 밀려든다. 아기 달래다가 설거지, 아기 안주다가 빨래, 아기 젖먹이다가 청소기, 그러다가 이유식 만들기 대략 이런 패턴의 도돌이표를 수십번 돌리고 나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육체가 지쳐갈수록 영혼은 공허해진다.


 징징징 울다가 잠든 아기를 몇 번의 실패 끝에 겨우 눕혀놓고 혼자 책상이 아닌 식탁에 앉아서 겨우 커피 한 잔 들이키는 저녁,  눈물은 전에 느끼지 못했던 더 많은 것을 포함하며 밀려왔다.(그 복잡다단한 심정에 대한 자세한 풀이는 다음 시간에.) 그야말로 진정한 처.음. 나의 첫(?) 육아의 시간들. 사실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앞으로도 아마 그럴거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그래서 두렵지만 또 설레기도 했던 오롯한 나의 모든 처음들. 아직은 젊고, 또 아마도 살아온 날보다는 살아갈 날이 많겠지만(?!) 조금은 알 것 같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가진 고독함과 쓸쓸함의 무게를 말이다. 앞으로는 갈수록 한 글자 또박또박 발음할 때마다 감탄하게 될 것 같다. 아, 이 단어 말이지. 알면 알수록 뜻과 발음이 잘 어울린단 말이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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