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베르헤르의 <로봇 드림>
몇 해 전에 무작정 혼자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아무 곳이나 내려 싸구려 모텔에 몸을 맡겼고. 새벽녘쯤 잠에서 깨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적막한 도심 속 가로등 불빛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자 새벽의 찬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홀로 서있다가 ‘누군가 저기에 서서 나를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야심한 새벽에 누군가 나를 쳐다본다면 오히려 무서울 일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간절했다. 혹여라도 누군가 방문을 두드린다면 나는 의심 없이 문을 열고 그를 꼭 안아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외로움이란 이토록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도그도 누구보다 외로움에 익숙하다. 건너편 아파트에서 속삭이며 웃는 커플을 바라보는 도그의 처지는 쓸쓸함 그 자체였다. 텅 빈 집에서 애꿎은 리모컨만 누르며 시간을 때우던 그때. “외로우신가요?”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마주한 광고 문구는 마치 도그의 마음속을 읽은 것만 같았다. 도그는 고민할 틈도 없이 반려 로봇을 주문했고 설렘 속에서 조립을 시작했다. 그렇게 완성된 로봇은 도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날 이후로 로봇은 도그의 옆자리를 항상 지켜줬고 점점 서로를 닮아가며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변에서의 사고가 그들을 강제로 갈라놓았던 것이다. 서로가 처음이었던 둘은 상대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 서투름은 돌이킬 수 없는 이별로 이어졌다. 예기치 않은 헤어짐은 로봇에게 끝날 줄 모르는 악몽을. 도그에게는 다시금 깊은 외로움을 안겨주었다.
이렇듯 관계란 늘 완벽하지 않다. 영화 속 도그와 로봇처럼 우리 모두 엇갈림 속에 놓여 있다. 사람들은 운명 같은 만남이 반드시 영원할 거라 믿지만 사실 그런 인연조차도 한순간의 어긋남으로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많은 헤어짐을 겪으며 내가 깨달은 건 이별은 극적인 사건이 아닌 사소한 오해와 미묘한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함께한 세월이 한순간에 끝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별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허무히 찾아온다. 제 아무리 상대를 아끼고 노력해도 어쩔 수 없이 멀어지는 순간이 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두려움을 견딜 수 없어서 번번이 도망쳐왔다. 그래서인지 늘 관계의 끝을 염두에 두고 사람들을 만나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어떤가요. 마음만으로 다가올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
시간이 흐른 뒤 도그는 새로운 로봇을 만나고 로봇도 라쿤과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 둘은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생겼지만 다시 재회하지 않는다. 대신 함께 들었던 노래를 틀고 춤을 추며 잠시나마 같은 추억 속에 머문다. 서로가 곁에 있어 행복한 시절 속으로.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친구와 춤을 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즐거워 보인다. 그 춤은 서로를 향한 아쉬운 안부가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는 마지막 작별 인사인 셈이다. 그렇게 둘은 옛 인연을 떠나보내며 현재의 관계에서 행복을 찾아나간다.
“Do you remember
The twenty-first night of September?
Love was changing the minds of pretenders
While chasing the clouds away“
아직도 나는 당신들에게 오점으로 남아 있을까요. 아니면 이름조차 잊힌 누군가 일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지우고 싶은 기억일 수도 있겠네요. 알아요. 나조차 그 시절을 떠올리면 수치스럽고 초라해지니까요. 당신들의 애정이 존경스러울 만큼 그때의 난 너무 한심했어요. 처음에는 상대를 이해할 수 없어서 미워했죠. 하지만 반복되는 이별 속에서 알게 됐어요.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바로 나더군요.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은 진정한 짝을 찾을 수 없다며 좌절했어요. 이 창피한 인생을 통째로 지우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었답니다. 그러나 이런 제게 다시 용기를 준 건 다름 아닌 당신들에게 사랑 받았던 기억이었어요. 그 기억들이 절 끌어내서 다시 사랑하고 싶게 만들었어요. 그래요. 저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싶었나봐요. 가짜 같은 삶 속에서도 우리가 짧게 나눴던 온정만큼은 진짜라고 믿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별은 정말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까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성장한 게 아니라 그저 다른 방향으로 돌아누운 것 같으니까요. 누가 언제쯤 편안해질 수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아마 평생을 괴로워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꼭 불행만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이 길고 긴 지루한 인생에서 잠시나마 곁을 내줬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니까요. 그러니 행복하세요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