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가랜드의 <시빌 워: 분열의 시대>
혹시 전쟁 영화를 좋아하시나요. 저 역시 전장을 누비며 활약하는 주인공을 보며 멋지다고 느끼지만 실제 전쟁은 영화와는 전혀 다르죠. 그곳은 영웅담이 아닌 비극만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폐허가 된 도시 속 무고한 시민, 그리고 고통받는 군인들의 모습이 화면 속에 비칩니다. 이런 장면을 보며 우린 전쟁터의 사람들을 단순히 게임 캐릭터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의 공포와 죽음을 마주하며 아드레날린을 느끼거나 즐거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죠. 전쟁터에서는 총알 한 발에 생명이 오가고. 우리가 느끼는 흥분과 긴장은 오직 극장 안에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말 그대로 현실의 전쟁은 끔찍한 참상 그 자체이죠.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끊이질 않고, 우리는 기자들의 카메라를 통해 그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곤 합니다.
영화 속 배경인 가상의 미국은 정부의 독재와 이에 맞서는 대항군의 반격으로 내전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베테랑 종군 기자인 리는 한 시위 현장에서 우연히 초짜 기자 제시를 도와주게 되죠. 자신을 우상으로 여기는 제시는 리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그녀를 쫓아다니지만, 리는 이런 현실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제시를 강하게 만류합니다. 사실 리의 목표는 동료 조엘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성사시키는 것. 그러나 리의 스승인 새미는 이를 극구 말리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여정을 경고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미는 끝내 그들의 여정에 합류하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제시도 열정과 설득으로 조엘의 마음을 움직여 계획에 뛰어들죠. 이렇게 리, 조엘, 새미, 그리고 제시. 네 사람의 워싱턴을 향한 험난한 여정이 시작됩니다.
안타깝게도 여정의 끝에서 새미는 동료들을 구하다 목숨을 잃고, 리는 그의 죽음을 카메라에 담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진을 끝내 지워버립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요. 제시 또한 새미의 죽음으로 강렬한 깨달음을 얻은 거 같죠. 워싱턴에 도착한 후 제시는 마치 각성한 것처럼 셔터를 마구 눌러댑니다. 심지어 조엘과 함께 한 건 건졌다며 웃음을 터뜨립니다. 셔터를 누르는 그들의 모습은 때때로 방아쇠를 당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반대로 리는 공황에 휩싸입니다. 냉철하게 사진을 찍던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폭격 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드러납니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고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목도한 그녀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전쟁을 경고한다고 믿었지만 전쟁은 결코 그녀의 뜻대로 멈추지 않았죠. 리는 자신이 중립적인 관찰자가 아닌 결국 방관자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그녀를 전장으로 몰아세웠던 원동력은 사라진 셈이죠. 워싱턴이 함락되는 순간에 리는 아마도 자신이 무엇을 위해 셔터를 누르고 있었는지 끊임없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총에 맞거나 죽더라도 셔터를 누를 거냐”는 제시의 질문에 리는 제시를 구함으로써 그 대답을 대신하죠. 반대로 제시는 아이러니하게도 리의 죽음을 카메라에 담게 됩니다. 그녀는 셔터를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몰입한 상태에 이르게 된 거죠. 제시는 리의 시신을 지나쳐 결정적 순간을 찍기 위해 대통령실로 향하고 리의 죽음은 허망하게 지나갑니다. 영화는 대통령 제압이라는 더 큰 사건 속으로 그녀의 마지막을 무심하게 묻어버립니다. 아무도 그녀를 조망하지 않고 누군가의 우상은 그렇게 화면 속에서 사라지죠. 그리고 그 순간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을 기록하는 순간부터 카메라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설지도 모릅니다. 비극을 담아내는 동시에 폭력의 수단이 될 위험도 내포하죠. 리도 처음에는 전쟁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지만 점차 자신의 기록이 무력하고 무의미하다는 회의감에 사로잡힙니다. 이념과 분쟁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희미해지고 죽음은 숫자로 전락하며 렌즈 앞뒤의 사람들 모두 거대한 비극의 일부로 남을 뿐입니다. 어쩌면 리는 방관자로 머무느니 눈앞의 한 사람이라도 살리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겠네요. 제시를 구하겠다는 그녀의 결단은 그동안 셔터를 눌러온 행위에 대한 반성이자 동시에 그에 따른 대가를 치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워싱턴으로 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마치 단란한 가족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아빠와 엄마, 할아버지, 그리고 딸. 전쟁만 아니었다면 그들의 드라이브는 평범하고 행복한 여행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이러한 이질적인 분위기 때문에라도 새미와 리의 희생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오죠. 과연 제시는 앞으로 셔터를 누르기 직전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여담으로 <시빌 워: 분열의 시대>는 기성 전쟁 영화들과 달리 오히려 좀비 아포칼립스를 연상케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치 미국만의 문제가 아닌 인류 전체의 위기라 경고하는 느낌도 듭니다. 또한 곳곳에서 잔혹한 장면들이 반복되지만 단순한 자극적인 볼거리가 아니라 깊은 충격을 남기도록 연출하죠. 겉으로는 전형적인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포장했지만 화려한 스펙터클은 오히려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잔잔한 로드무비의 형식을 취하며 묵직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