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행복한 세계로

샘 레이미의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by 김기범


주변의 따뜻한 위로가 오히려 당신의 마음을 차갑게 만든 적이 있었나요. 타인의 진심 어린 관심 속에서도 왜 나의 마음은 더욱 무너지는 걸까요. 그것은 인간이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의 슬픔을 가늠하죠. 그래서 지극한 공감조차도 결국 자기 경험의 반경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간극 속에서 격려의 말은 그저 공허하게 들릴 뿐이에요. 이해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깊은 고립 속에 가둬버립니다.


완다도 그랬을까요. 사람들은 그녀가 가진 힘에만 주목할 뿐이지 왜 그토록 필사적으로 행복을 좇는지 납득하진 못했을 것 같아요. 영웅들은 세계를 위한 제물이었고 그들의 희생 위에서 지구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 평온 속에서 그녀는 점점 죽어갔죠. 거기다 완다의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었고, 그 절망 속에서 간신히 붙잡은 환상마저 부정당했어요. 가족을 되찾으려는 것은 그녀에게 세계를 구하는 것만큼이나 절박한 일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세계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죠. 그녀가 진정 원했던 것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행복한 미래였으니까요. 완다는 처음부터 이해받을 수 없는 존재였을지도 모르겠어요. 모두가 상실을 겪었지만 그녀만은 그 슬픔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까요. 잊고 살아가는 것이 정답인 세상 속에서 그녀는 결코 잊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었죠.


솔직히 위로는 결국 일시적인 위안일 뿐, 현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고통을 드러낼수록 사람들은 불편해하며 되려 외면하기 바쁘죠. 이윽고 아픔을 이해하길 멈추고 상처받은 이들을 밀어내고 맙니다. 그러나 슬픔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오고, 때로는 발작처럼 주변을 어지럽히죠. 그래서 완다는 공감이 아니라 되찾기 위해서 또 다른 멀티버스를 찾아다닙니다. 바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곳을 말이죠. 그 과정에서 잔인할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더 나아가 다른 세계의 자신까지 위협하죠. 그래요. 행복을 향한 집착만큼 불행한 것이 있을까요? 그 끝에서 남겨진 것은 이해받지 못한 채 홀로 남겨졌다는 절망뿐입니다.


아메리카를 쫓는 순간부터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완다가 아니었습니다. 다크홀드를 손에 넣고 스칼렛 위치가 되어 버렸죠. 마침내 아이들에게조차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린 순간, 그녀는 자신이 괴물이 되었음을 인정합니다. 그저 끔찍한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되돌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며 최후를 맞이하죠. 그토록 원했던 행복은 끝내 손에 닿지 못한 채로 그녀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그렇다면 그 고통과 상처는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만일 어딘가에 당신이 행복한 세계가 있다면, 가고 싶지 않겠어?”


우린 완다의 서사를 알기에, 그녀의 타락은 더욱 비참하게만 다가옵니다. 어쩌면 한 인물을 이토록 깊은 불행 속에 빠뜨리는 과정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불쾌한 경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영화 속 완다의 모습은 강렬하게 화면을 지배하죠. 눈물을 머금은 그녀의 표정은 쉴 새 없이 행복하고 싶다고 외치는 듯하고, 그 절박함이 쏟아지는 순간마다 숨이 막혀옵니다. 피범벅이 된 채로 기어가는 모습은 처절함을 넘어서 공포스러운 광기가 느껴질 정도죠. 그녀의 무자비한 핏빛 일갈 속에서 관객들은 충격과 동시에 연민을 느끼며 대혼란에 빠집니다. 사실 저는 그녀의 계획을 끝까지 응원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녀가 던진 질문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아마 저 역시도 망설임 없이 그녀와 같은 선택을 했을지 모릅니다. 내가 행복한 세계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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