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트 베르거의 <콘클라베>
우리는 왜 의심을 멈출 수 없을까요. 분명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음에도 마음 한구석에서 늘 의심을 거두지 못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면 이상하게도 망설이게 되죠. 조심스러워서인지 아니면 겁이 나서인지. 선택을 내려야 할 찰나에 마음은 이내 뒷걸음치고 맙니다.
흔히 의심은 나약하고 소극적인 태도라고 배워왔습니다. 반면 확신은 강하고 믿음직한 것처럼 여겨졌죠. 확신에 찬 눈빛은 정확히 알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고. 그 반대편에서 의심은 마치 틀리거나 부족한 것처럼 부정적인 태도로 비치곤 합니다. 그래서 의심한다는 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방증 같기도 하죠. 그렇다면 우리가 갖는 확신은 정말로 믿을 만한 걸까요?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추기경들. 바깥세상과 단절된 공간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말없이 움직이는 눈빛들만이 교차합니다. 모두가 신 앞에서 당당히 맹세하지만 그 속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이 숨어있었죠. 그들의 내면에선 기도가 아닌 계산이 이어지고, 각자의 신념이 얽히면서 드러나지 않던 진실들이 하나씩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 안에서 로렌스 추기경은 조심스럽게 고백합니다. 신앙이나 믿음에는 달라진 게 없지만 기도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죠. 그건 단순히 신에게 자신의 말이 닿지 않다고 느껴서가 아닐 겁니다. 아마도 자기 안의 목소리가 멈춰버린 상태겠죠. 그는 오랫동안 확신 속에 살아왔을 테고. 신의 뜻 아래서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믿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떤 말도 믿을 수 없게 됐죠. 말하자면 자기 내면 속에서 의구심으로 가득 찬. 즉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는 마비상태에 이른 겁니다.
살다 보면 문득 그런 순간이 찾아옵니다. 마음이 갑자기 고장 나버린 것 같은 때 말이죠. 모든 것이 낯설고 멈춰버린 기분에 휩싸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기에 어설프게나마 자신을 믿어보려 애쓰게 되죠. 로렌스 추기경도 그랬습니다. 끝내 누구도 믿지 못한 채로 결국 자신의 이름을 투표지에 적어 넣습니다. 신기하게 바로 그 순간 성당의 천장이 무너져 내립니다. 갑자기 일어난 테러로 인해 투표는 중단되고 말죠. 그 장면은 마치 섣부른 확신에 내리는 신의 경고처럼 느껴졌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실수를 감췄고 누군가는 죄책감에 침묵합니다. 그리고 목적을 위해 상대를 모략하기도 했죠. 그런데 그 진실을 알아챈 건 바로 로렌스 추기경이었습니다.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은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입니다. 그 의심은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고 또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게 바로 굳게 잠긴 방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고 결국 진실로 향하는 하나의 통로인 셈이었죠.
콘클라베가 끝나고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은 인터섹스입니다. 이 충격적인 결말은 단순한 반전을 넘어 오랫동안 교회가 외면해 온 질문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듭니다. 수녀가 된 여성은 정해진 자리 너머로 결코 나아갈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사랑과 포용을 이야기해 온 교회는 정작 자신들 안의 차별은 묵인합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질서와 구조. 그 안에 숨어 있던 배제의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죠.
강한 믿음은 우리를 빠르게 나아가게 하지만 종종 잘못된 길로 빠지게도 하죠. 그럴 때 필요한 건 의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심은 불편하지만 바른 길로 이끄는 힘이 있죠. 비록 느리지만 단단한 거북이처럼 말이죠. 네 맞아요. 작은 의문 하나가 우릴 깨어 있게 하고 지금 이 세계가 정말 괜찮은지 되묻게 하니까요. 그러니 부디 우리로 하여금 의심하게 하소서. 혹여 누군가 그걸 어리석다 부를지언정, 그 유약함이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마음이 결국 진리에 가까이 닿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