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런 애러노프스키의 <더 웨일>
고등학생 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구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는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 두렵다며, 사후세계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죠. 덧붙여 자신이 죽은 뒤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고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적잖이 놀라 물었어요. 죽고 나서도 내가 이어진다면 난 언제 쉴 수 있어? 대체 언제쯤 생각을 멈출 수 있는 거야?
왜 생각은 멈추지 않고 나를 괴롭히는 걸까요. 부끄러운 기억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고. 잘못된 선택과 반복되는 후회 속에 너무 지쳤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지구가 멸망하길 바랐지만 그런 징조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더군요. 세상은 언제나 건재했고 병든 건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에 좌절했습니다. 그렇게 삶의 구멍이 느껴질 때면 위장 속으로 뭐라도 밀어 넣어야 겨우 잠들 수 있었어요.
찰리도 폭식으로 그 공허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사랑했던 연인이 거식증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육체는 점점 거대해졌고 마침내 스스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는 에세이를 가르치는 강사지만 학생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카메라가 고장 났다고 애써 둘러대지만 실은 자신의 고래만한 몸집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었죠. 그의 강의 화면 한가운데 비어있는 검은 공백은 마치 심해로 이어지는 구멍처럼 깊고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찰리에게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 발작이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죠.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마침 토마스가 그의 집을 방문하고. 찰리는 다짜고짜 토마스에게 에세이 한 편을 읽어달라고 다급히 외칩니다. 영문도 모른 채 낭독된 글은 기적처럼 찰리의 숨을 다시 고르게 가라앉히죠. 그 글은 자신의 딸 앨리가 어릴 적 쓴 모비딕에 관한 짧은 글이었습니다. 찰리에게 그 글은 마치 자신만의 성경이자 간절한 비망록이었죠.
이윽고 토마스는 신앙을 통해서 도움이 되고 싶다며 손을 내밉니다. 그러나 찰리는 구원 따위는 관심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죠. 왜냐하면 토마스가 믿는 종교가 사랑했던 남자를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토마스의 믿음은 곧 찰리의 가장 깊은 상처를 건드리는 일인 동시에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찰리는 연인의 죽음을 지켜보며 어떤 위로나 믿음도 고통 앞에서는 아무 힘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죠.
찰리는 동성 연인과의 사랑을 택하고 가족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그래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합니다. 죽음을 앞둔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한 듯이 딸 앨리를 부르고. 그녀에게 유산으로 전재산을 남기고 졸업 에세이도 대신 써주겠다 약속하죠. 하지만 평생 단 한 번의 연락도 없던 아버지가 이제와서야 자신을 찾는다는 사실에 앨리는 격분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욕설을 퍼붓고 얼굴조차 꼴 보기 싫다며 차갑게 등을 돌리죠. 이미 그녀는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운 채, 그 어떤 온기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죠. 그녀의 어머니조차 앨리를 사악한 아이라며 포기했지만 찰리는 끝까지 앨리를 믿었고. 모든 경멸 앞에서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그녀를 받아들입니다. 그 아이는 잘못되지 않았다며 도리어 틀린건 세상이라는 듯 말이에요.
아마도 찰리는 앨리가 쓴 에세이 속에서 그녀의 진심을 읽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래는 죄가 없고 그것만 죽이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생각이 가엾다고 쓴 앨리는 이미 알고있던거죠. 아무리 아버지를 미워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걸. 하지만 깨달음과 별개로 상처 입은 삶을 긍정하고 아버지를 용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의 사랑은 너무 늦었고 미안해란 말로는 상처를 돌이킬 수 없었죠. 지금 그녀는 온통 증오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찰리는 어떻게든 그 어둠을 걷어주고 싶었죠.
리즈는 누구든 타인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앞둔 찰리는 내가 살아오며 제대로 된 일을 한 적이 있는지 꼭 확인해야겠다며 리즈에게 소리치죠. 용서받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끝까지 앨리를 사랑하려 애씁니다. 넌 훌륭한 아이라며 마지막까지 믿음을 거두지 않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바란 것은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딸이 증오에서 벗어나 솔직하게 살아가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죠.
찰리는 남은 힘을 다해 앨리를 향하여 한 걸음씩 발을 내딛습니다. 결국 그 진심이 전해졌는지 앨리는 분노를 내려놓고 눈물을 흘리죠. 그녀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환하게 미소 짓고, 그 순간 찰리를 짓눌렀던 죄의 무게가 가벼워지듯이 그의 몸은 떠오릅니다. 사실 그녀가 가장 되돌리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 동시에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였던 아버지 그 자체였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용서받지 못한 자의 진심은 마지막에야 비로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닿게 되죠.
그리고 과거의 기억이 흐릅니다. 찰리가 떠나기 전, 가족이 함께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내던 그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 속에서 앨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모래로 작은 집을 짓고, 찰리는 발에 상처를 안고 바다를 조용히 바라봅니다. 마치 떠날 채비를 하는 사람처럼 말이죠. 그곳에서 영화는 쓸쓸히 막을 내립니다. 그래서 그들이 정말 구원받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사랑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느낄 수 있었고, 저는 그것만이 이 불행한 세계의 유일한 구원이 아닐까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옳은 선택만을 하며 살아갈 수는 없죠. 인생에는 정답은 없고 우리는 종종 길을 잃거나, 어떤 잘못은 평생토록 용서받지 못하죠. 상처 주고 실망시키고 때로는 스스로를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순으로 가득한 존재예요. 그렇게 우리는 모든 걸 놓아버리고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하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우리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오는 건. 바로 누군가를 사랑했던 기억. 그 기억만이 끝내 우리를 다시 붙잡아줍니다. 그 사랑이 비록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더라도 비틀리고 어긋난 삶을 다시 끌어안게 하죠.
다시 죽음에 대해 나눴던 그날로 돌아가서. 나는 사후세계가 있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말에 이를 악물고 대답했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지 않니? 난 죽어서만이라도 좋으니 완전히 사라지고 싶어. 그러자 친구는 나지막이 말했어요.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 만큼은 다시 보고 싶지 않겠어?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그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