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 사이의 벽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

by 김기범

눈을 감아보세요.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있나요. 그 사람과 당신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요. 같은 나라, 같은 도시, 어쩌면 바로 옆자리에 있을 수도 있겠네요. 아마 물리적으로는 그리 멀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마음과 당신 마음 사이의 거리는 어떤가요. 가깝다고 느끼나요. 아니면 아득히 멀어서 가늠할 수 조차 없으신가요.


우리는 종종 상대를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은 우리를 그 사람에게 다가가게 만들죠. 그러나 그 거리는 쉬이 좁혀지지 않고.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을 걸고, 표정을 살피며 몸짓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함께 포개져 누워 서로의 눈을 지긋히 들여다본다면. 혹여나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면. 그러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나요. 정말로 그 순간 우리는 서로의 마음에 닿는 걸까요.


안노 히데아키는 에반게리온을 통해서 그 질문의 대답을 보여줍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AT필드(Absolute Terror Field)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일종의 방어막입니다. 초반에는 의문의 적인 사도들이 가진 특수한 기술처럼 보이지만, 후반에 들어서면 인간 역시 AT필드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죠. 그것은 곧 나와 타인을 구분 짓는 경계이자, 카오루는 그걸 마음의 벽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벽은 우리가 서로에게 가까워질 수 없게 만드는 걸림돌처럼 여겨지죠. 그 때문에 개개인을 구분 짓는 경계를 넘어서 서로를 이해할 수조차 없게끔 만듭니다. AT필드는 나라는 형태를 유지시키고 날 지켜주는 요새 같기도 하지만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등장인물들을 본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를 고립시키는 감옥과도 같다고 느껴지죠.


에반게리온의 서사는 사도라는 적은 누구인가에서, 점차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과의 싸움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점점 감춰진 진실들이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네르프와 제레의 목적은 서드 임팩트를 미연에 막기 위한 단체로 보였지만 실상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죠. 바로 인류보완계획입니다. 인간의 고독과 불완전함, 그리고 이 모든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핵심 그 자체죠.


마치 인류보완계획만이 인류의 마지막 희망처럼 묘사되면서 겉보기에는 구원같이 포장되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죠. 그 계획은 모든 인간의 AT필드를 해체하여, 서로의 경계를 없애고 모두의 의식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독한 외로움의 종말이자 동시에 인류의 소멸이기도 합니다.


마침내 계획이 실행되며 사람들의 형태는 하나둘 사라져 갑니다. 어떤 이들은 공포에 떨며 녹아내리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마주하며 행복하게 끝을 맞이합니다. 비명과 탄성이 뒤섞인 최후의 혼돈 속에서 신지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이대로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 모두가 하나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고통스럽고 외로운 현실로 돌아갈 것인가. 타인에게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마음을 닫고 있던 신지는 결국 현실을 선택합니다.


핏빛 폐허 위, 신지는 아스카와 나란히 누워있습니다. 모두의 마음이 흘러넘치고 모든 욕망과 상처가 공유되는 세계. 원망과 수치심, 후회가 뒤섞이고 신지는 말없이 아스카의 목을 조릅니다. 하지만 아스카는 그런 신지의 뺨을 어루만지죠. 그러자 신지는 울음을 터뜨리고 이내 목을 조르던 손을 내려놓습니다. 잠잠코 있던 아스카는 그런 신지를 빤히 쳐다보며 말합니다.


"기분 나빠"


서로의 벽이 허물어지고 모든 진심이 드러난 순간에도, 결국 그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니 이해하길 거부합니다.


저도 언젠가 누군가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적이 있습니다. 한때 같이 다녔던 친구들이 절 가식적이라 짜증 난다고 말하는 걸 우연히 엿듣게 되었죠. 나는 늘 솔직함이 중요하다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예상보다 더 날카로웠고 내게 큰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내가 진심을 다해서 노력하면 상대도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 믿었지만 결과는 오히려 반대였죠. 친구들은 나를 무시하거나 일부러 밀어냈습니다. 도무지 그 오해를 풀 자신이 없어서 그저 좌절했습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다면 어땠을까. 그때 난 깨달았습니다. 진실이 꼭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믿었던 그 솔직함이 오히려 나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요.


우리의 감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관계는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만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어 하죠. 알게 되면 더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는 믿음. 그것은 오만한 착각입니다. 타인의 진심을 낱낱이 알게 된다면 우리는 그걸 온전히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아마 공감보다는 반발심이 먼저 들 수도 있겠죠. 마치 주변이의 아픔을 알면서도 손 내밀기를 주저하는 것처럼요. 만약 상대의 욕망을 알게 된다면, 그때 당신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내게 상처 준 이의 상처까지 과연 보듬어 줄 수 있을까요?


이 결말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결국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보이지 않는 벽이 우리 사이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으니까.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해도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삶이란 상처를 안고 홀로 버티는 일인 것 같아요. 한번 산산조각 난 마음은 절대로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기에. 그저 타인이 두려워 더더욱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을 뿐이죠. 그러므로 사람들은 점점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멀어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지가 임팩트를 중단시킨 이유는 다시 타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위로와 아버지의 인정과 같은 다정한 온기. 그렇기에 부딪히고 깨지면서도 현실 속에서 다시 일어서려고 합니다. 절망스럽지만 그게 바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날 바라봐줄 타인이 없다면 우리 자신도 없을 테니까요. 작 중 제레는 인간의 수만큼의 희망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신지는 그 희망을 놓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기대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이란 슬픔을 견디는 일이기에 고독 역시 끝까지 그 곁에 머무르겠죠.


네 맞아요. 넘을 수도 무너뜨릴 수도 없는 이 단단한 벽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덕에 우리는 서로의 벽에 등을 기대어 잠시 쉴 수 있는거겠죠. 우리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겠지만요. 그러니 부디 당신은 모든 것을 이해하려 애쓰기를 포기하길 바랍니다. 우리는 영원히 혼자니까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잔혹한 사랑의 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