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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수 Jan 14. 2020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얻은 선물.


재수시절까지 거치며 어렵게 입학한 대학이었지만,
원하고 기대하던 대학이 아니었습니다. 꿈꿔왔던 멋진 대학생활도 아니었구요. 

F를 모으면 작은 권총 부대 하나를 꾸릴 정도의 무시 무시한 학점을 장착해가고 있었습니다. 

의미도 목적도 없는 생활이 계속됐습니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다는 느낌이 한꺼번에 몰려오던
어느 가을 오후였습니다. 배낭을 메고 무작정 터미널로 갔습니다. 

행선지의 팻말들을 쭈욱 둘러보던 중
 ‘땅끝’이라고 써진 빨간 글자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 아,,,바로 저기다 !’

저 ‘끝’이라는 마을에 도달하면 내가 찾는 답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어딘지도 어떤 곳인지도 몰랐지만, 그 당시의 심정이 ‘끝’이라는 단어에 홀린듯 이끌렸던 것 같습니다. 표를 끊고 버스에 올랐습니다.

가는데 날은 점점 어둑해지고, 땅끝마을로 가는 비포장 완행 버스에는 저와 기사님 둘만 남았습니다. 서로 대화는 없었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낯선 여행지로 들어서는 두려움이 덜 했습니다. 굽이 굽이 달려 땅끝에 도착했습니다. 온통 암흑이었습니다. 이땅의 모든 어둠을 이 곳에 다 모아 좋은 듯 어디서도 보지 못한 까만 밤이었습니다. 간간히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잠시 정적을 깰 정도로 고요했습니다. 터벅 터벅 걸어가는 내 발자국 소리에 스스로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어둠 사이의 빛을 찾아 헤메다 간신히 한평 반 정도 될 법한 민박집을 찾아냈습니다. 피곤한 몸을 눕히고 티비를 켰습니다. 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한창이었으니까, 아마 그 때가 시월의 마지막 주쯤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티비안 사람들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티비를 끄고 자세를 가다듬고 앉았습니다. 적막한 낯선 공간에 있자니 조금 무섭기도 했다가 금방 또 무료해졌습니다.

오만 생각이 교차하던 중 출발할 때 배낭에 급하게 챙겼던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 시절의 베스트셀러였던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답사기였습니다. 빈 배낭를 어깨에 맸을 때의 불편함을 생각해 무게가 좀 나가는 책을 넣었던 겁니다.

무심코 책장을 넘기는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나왔습니다.

김지하 시인이 스물한살일 때. 빈털털로 힘들게 살아가면서 세상의 뜻을 잃고 말았다고 생각하면서 절망의 나날을 보냈다고 합니다. 자신을 끝내버릴 작정으로 땅끝행 배를 탔는데, 결국 그 사건은 시도에 그쳤고 ‘애린’이라는 시만 남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소개 글을 읽고 어찌나 놀랐는지. 21살이었던 그 때의 나와 나이도 겹친다는 생각에 더욱 공감이 갔던 기억납니다.

애린의 시는 이런 내용입니다.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이 시가 내 눈에 들어 오던
그 가을밤 민박집의 온도와 공기,
소리의 감각이 스무해가 넘은
아직도
남아 있는 걸 보니
참 특별한 경험이었나 봅니다.

그 밤을 보내고 저 또한
김지하 시인과 마찬가지로
땅끝에서 새가 되어 날거나
물고기가 되어 숨지는 않고
집으로 별일없이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는
좁게만 보였던 시야가 넓어진 이유에서일까요.
그 이전보다 더 열심히 긍정적으로
새로운 마음을 다잡고 대학생활을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 이 후로도 제가 심정적으로 괴로울 땐
그 해 그 가을 땅끝에서 바라 본
망망대해를 떠올리곤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고개를 들어 ‘땅끝’을 보자고
그러면 지금 보이는 ‘땅밑’이
다르게 보일거라고.

이 깨달음이 제가
스무살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 받아서,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선물입니다.

#씽킹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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