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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수 Mar 21. 2021

재능은 기브 Give가 아니라 리브 Live 하는 것

디자인 하나만 해줘.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달고나서 정말 많은 부탁을 받아왔다. 내 상황이 아주 어렵지 않다면 대부분 거절하지 않고 해줬다. 부탁하는 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부탁할 때는 그 사람 또한 내가 부탁했을 때 흔쾌히 수용하겠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모두 그렇지는 않겠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부탁할 때는 그런 마음이다.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예 부탁조차도 하지 않으니까.


로고 하나만 그려줘.


그려놨던 마크 하나만 보내 달라는 말이 상처가 될 때도 있지만 내가 해 준 디자인이 그 사람의 사업과 브랜드에 도움이된다면 그걸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디자인의 목표점에 가기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할 수준의 디자인만 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런 부탁은 대부분이 항상 촉박한 경우가 많다. 할 수 없이 시장에서 디자인이 어떤 경쟁력을 가질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부탁한 사람이 마음에 들어할만한 예쁜 걸 만드내는데 힘을 쏟았던 것 같다.


이 지점에서 굉장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디자이너는 자기가 내 놓은 디자인이 자기 자식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자식을 잘 못 키워 경쟁력 없고 매력도 없는 아이로 세상에 내놓는 마음이랄까. 그것대로 잘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그런 자식을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했던 결과물에 대해 내 스스로 만족감이 떨어진다는 건 그런 느낌이었다. 많은 비용을 받고 그 느낌을 받는다고 해도 싫은데, 어떤 댓가도 없이 그래야 한다는 건 고통이었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내가 그 부탁을 허락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부탁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내 자존감이니까. 그런 생각이 든 이후로느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다. 기분 나쁘지 않게 최대한 정중하게.


직업인으로서의 디자이너.


통장에 입금이 되는 순간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몸도 만든다는 배우의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또 어떤 배우는 연기를 왜하느냐는 질문에 잘 먹고 살려고, 자식들 좋은 것 먹이고 예쁜 옷 사줄려고 한다는 인터뷰를 본적이 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배우란 폼나는 예술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통념이 완전히 깨졌다. 저들도 결국 연기로 생활을 유지해가는 곧 직업인들이구나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할 예술을 만들 욕심보다는 당장 오늘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사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들이 배우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평범한 구성원으로 다가왔다.


디자이너들 또한 그 배우들과 다르지 않다. 연기 대신 디자인 재능과 능력을 발휘해 돈을 번다. 디자인 재능 하나만 써 달라는 건 얼마의 돈을 달라는 것과 뭐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내 돈을 쓰는 일은 기꺼이 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 돈을 써가면서 고생까지할 이유가 있을까.


디자인이 곧 돈이라는 인식이, 디자인 해주는 일이 곧 비용을 쓰는 일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있다면 디자인을 그렇게 쉽고 가벼운 일로 생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눈에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들을 비용으로 인정해주는 인식이 더 넓고 깊이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쓸만한 재능으로 만들기까지.


내 디자인이 쓸만해진 시간을 따져봤더니 고등학교 입시 2년 대학 4년 디자인회사 15년 합했더니 20년이 넘는다.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좀 쓸만해지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렸다. 이 긴 시간의 고민과 노력들이 내가 하고 있는 디자인에, 내가 앞으로 할 디자인에 녹아드는 것이다. 디자인뿐 아니라 모든 다른 분야의 창작자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디자이너가 만든 로고 하나에 20년의 시간 동안 쌓아왔던 한 디자이너의 노력이 들어간다고 하면 과연 얼마의 값을 메겨야 할까? 그 걸 생각하면 로고 하나만 그려줘라는 말이 입밖으로 쉽게 나올 수 있을까. 디자이너의 재능은 타고난 게 아니라 시간의 쌓임으로 바라봐 주면 좋겠다. 무한정 나눠줄 수 있는 지하자원같은 게 아니라, 보석을 만들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갈고 닦고 단련해 온 결과인거다.


기부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기부는 내 재능이 아니라, 현금으로 화끈한 기부를 하고 싶다. 디자이너이자 경영인 배민의 김봉진 의장처럼. 내 재능은 기브(Give)하기 위해 쓰이는 게 아니라, 리브(Live)하기 위해서만 쓰여야한다. 오늘도 살기위해 디자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또 살만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긴하지만.


| 매거진 브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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