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말하고 선언해보기
시각디자인과를 처음 입학했을 때 하늘처럼 보였던 4학년 선배가 했던 말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넌 졸업해서 뭐하고 싶니?' 나는 별로 망설임없이 ‘저는 CI를 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햇병아리 신입생의 입에서 CI(Coporate Identity)라는 단어가 툭 튀어 나오자 선배는 꽤나 놀란 듯 보였다. 아마 그때의 선배는 졸업작품 중 가장 어렵다는 CI과제를 하고 있었을 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그 땐 CI가 정확히 어떤 건지도 잘 몰랐다. 삼성이나 엘지같은 기업들의 로고나 심벌 만들기 정도로만 짐작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내 눈에는 디자인의 여러 분야 중 최상위의 레벨이자, 디자인 생태계의 최종 포식자같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CI는 기업이나 브랜드를 대표하는 얼굴이자 경영의 출발점이기도 하니까.
선배에게 그런 대답을 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중간에 편집디자인이나 영상디자인에도 잠깐 한눈을 팔다가도 아이덴티티 디자인으로 관심이 돌아왔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1학년 첫 학기에 선배에게 말했던 CI전문 회사로 취업하게됐다. 이적과 유재석이 부른 ‘말하는 대로’라는 노래 가사처럼 되는 걸 보고 혼자서 무척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디자인 전문회사에 입사해서는 신입으로써의 어려움과 배움을 기록하는 업무 일기같은 걸 썼었다. 어느날은 쓸 내용이 마땅히 없어 앞으로 5년간의 직책과 목표와 연봉까지 나의 미래를 아주 자세하게 생각나는대로 적은 적이 있다. 5년 후 그 지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곳에 적힌 것과 거의 똑같은 삶을 현재 살고 있었으니까. 일부러 맞출려고 해도 맞추기 힘들 정도로 같은 걸 보고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12년간의 회사생활을 마치고 독립을 하고 가장 먼저한 일도 내가 만든 회사의 미래 비전에 대해 그려보는 일이었다. 처음은 프리랜서처럼 시작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이루고하는 일들을 위해 여러사람들과 다양한 일들을 함께하는 꿈을 상상했었다. 그래서 BRIK이라는 이름의 벽돌이 Branding BRIK, Living BRIK, Storytelling BRIK등으로 확장해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조금씩 천천히 그것들을 경험하고 실행해가면서 처음 계획을 참 잘 세웠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생각할수록 맞아 떨어지고 확신도 생겼다. 속도는 느리지만 내가 상상했던 대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그 때 생각했던 사업기획들을 더욱 정밀하고 정교화하게 만들어 가는 중이다.
이런 경험들 때문인지 나는 사업을 할 때도 인생 계획을 세울 때도 사소한 계획을 세울 때도 머리 속에 먼저 그려보고 노트에 적어보는 편이다. 지금까지는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 대로 써 넣은 대로 나의 삶이 흘러 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가 그리는 미래들이 선명하게 각인되고 실행되는 걸 보면 내 머리 속 깊은 곳 어딘가에 나의 계획과 스케쥴을 새기고 있는 세공사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상상도 해본다. 내가 쓰고 말한 계획들을 가만히 듣고 내 삶의 무늬와 패턴을 남기는 사람이다. 만나진 못하더라도 분명 있을 거라 믿고 싶다. 그러니 앞으로도 기획하는 일과 삶의 계획들을 계속해서 그 분께 세세하게 작성해 보고할 생각이다.
사회생활 3년차. 서른한살의 내가 떠오른다. 마포 만리동 고개의 어느 2층 카페에서 후배에게 내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에 대해 신나게 말했다. 마흔에는 교보문고 앞에서 출간 사인회를 할거야라고. 후배와 헤어지고 고개의 오르막을 걸으며 혼잣말을 했다. ‘그랬으면 참 좋겠다’라고.
후배에게 선언했던 시기는 많이 지나 버렸지만, 앞으로 몇년 후에는 그 꿈을 꼭 이루고 싶다. 그 꿈을 이루고자 앞으로 5년 계획표를 다시 적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