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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현수 Jun 30. 2023

말로 그려보는 기획의 밑그림

입기획이 꼭 필요한 이유

기획서를 쓰기 위해 일단 파워포인트 화면을 켭니다. 깜박이는 커서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봅니다. 어디서부터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합니다. 한글자도 쓰지 못하고 화면을 닫습니다. 아마 기획서나 보고서, 제안서 등을 써보신 분들이라면 많이들 공감하실거라 생각합니다.


기획서에서 뭘 얘기할지, 어떤 내용으로 채워 넣을지, 어떤 흐름을 만들어갈지 생각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파워포인트 창부터 열어 놓으면 당연히 진도가 나갈리 없을 겁니다. 제 아무리 기획의 천재라 할지라도요.


사실 기획이라는 게 뭔가 엄청난 게 아니죠. 내가 생각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풀어 놓고 그 이유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는 거잖아요. 다시 말해 기획은 내가 짠 하나의 플랜이고 이야기인거죠. 당연히 거기에는 흐름도 기승전결의 전개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기획은 '글'보다는 '말'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기 가장 좋은 방법은 사실 건조하고 딱딱한 문서보다는 약간의 습도를 머금은 공기가 담긴 음성이니까요. 소리뿐아니라 목소리의 진동과 울림은 우리 피부에도 닿습니다. 체감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야기가 새하얀 백지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몸 전체로 느껴질 수 있는거죠.  


굉장히 난해하고 복잡한 사건이나 생전 보지 못한 현상같은 걸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왠만한 생각들과 묘사는 말로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획서를 만드는 데 있어서도 먼저 말로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일단 파워포인트부터 열어 놓고 장표를 만들기 시작할 게 아니라 말로 기획의 큰 방향성도 얘기해보고 기본 개념이 정리 되면 누군가에게 설명을 해보면 좋지 않을까요. 상대가 없다며 혼자말이라고 해서 내 이야기가 말이되는지 흥미진진한지를 체감해보는 겁니다. 물론 시각 자료를 보여주지 못하는 답답함도 있고, 문자로된 명확한 의사소통은 어렵긴 할겁니다.


마지막으로 재직했던 회사 대표님과 이런 식으로 함께 기획하고 소통을 많이 했었습니다. 본사가 지방에 있다보니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를 나눌 기회가 쉽지 않아서 긴시간 전화로 얘기를 나눌 때가 많았습니다. 일상적인 대화부터 기획에 관한 부분들까지 합쳐보면 연애할때보다 더 긴시간 통화를 나눴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화상 회의가 일반화됐을 때도 아니고 해서 어떤 기획을 할 때면 간단한 스케치 초안이나 메모를 준비해 긴 시간동안 기획안에 대한 방향성과 채워갈 내용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는데요. 사실 이전까지 저는 상상도 못할  방법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춘 기획서 초안을 가지고 직접 만나서 의견을 나누어야 된다고 생각했지 말로만 떼우는? 식으로 할 생각은 절대 못했죠. 하지만 그 간단한 기회 초안조차도 막상 만들려면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가죠. 어떨 땐 완성본이 나오기도 전에 벌써 지친 느낌이 들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말로만 생각을 나누면 내 생각을 마음껏 공중에 스케치를 하듯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죠. 시간도 얼마 걸리지도 않습니다. 이런 말로 기획하고 설명하는 장점을 알게 되자 말로 내 생각과 기획을 스케치하는 걸 더 적극적으로 해봤습니다.


상대는 함께 기획을 준비하는 분이 될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내 생각을 이해할만한 분들이라면 누구든 상관없이 음성을 통해 내가 세운 기획에 대해 설명하고 의견을 주고 받았습니다. 꼭 프로젝트 관련된 게 아니라도 사업 아이디어가 있을 때도 그분들에게 통화버튼을 누르곤 했습니다. 그림도 문자도 없고 오직 음성이 담긴 내용들만 있어서 처음에는 답답할 수도 있지만 하면 할수록 표현력도 늘어나고 오해하지 않을만한 표현법을 찾을 수 있게 되더군요.


또한 말은 글과는 다르게 순서를 왔다 갔다 할수도 있어 좋습니다. 생각의 흐름을 논리에 맞게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글과는 달리 말은 잘못된 표현이나 생각이 나오면 바로 바로 수정해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받아들이기에도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글보다는 훨씬 수월하죠. 말로하는 건 강조와 생략이 심하더라도 의도한 내용을 쉽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최근 프로젝트에서도 이렇게 말하는 기획으로 기획서를 만들었습니다. 병원 브랜드 관련한 기획이었는데 함께 기획서를 만드는 대표님과 메모하나 사진 한장없이 한시간 가까이 통화를 하면서 전체 기획의 아웃라인을 함께 그려냈습니다. 음성으로된 말과 의미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덧붙이고 순서를 바꿔가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 단한버의 통화로 서로 생각의 핏도 맞추고 최종 만들어질 결과물에 대한 예상도 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물의 내용과 퀄리티에 대한 불안을 미리 떨쳐내고 더 자신감 있게 내용을 보강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말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지 않았다면, 그런 과정을 생략했다면 생각의 일치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했을 겁니다. 몇 번의 번거로운 수정의 과정을 거쳐야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을 통해 나온 기획 초안은 2-3일의 본격적인 기획 문서 작업을 통해 살을 붙이고 근거를 탄탄히 하고 더 좋은 아이디어를 추가해 빠른 시간 안에 괜찮은 결과물로 완성됐습니다.


이렇게 ‘말로 하는 기획’의 효용을 인식하고 얼마 전부터는 주니어 디자이너 코칭을 하는데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완성된 디자인 보고서나 기획서를 만들기 전에 앞으로 어떻게 이걸 구성할 건지를 말해보는 시간을 꼭 가집니다. 이번 프로젝트은 왜 시작을 했는지, 어떤 게 가장 중요한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앞으로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지에 대해 설명해보라고 합니다. 대답을 듣고서는 좋은 건 더 그 생각을 살려주고, 너무 평범한 건 다른 더 좋은 생각을 할 수 있게 유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맞추기 어렵지만 수차례 서로의 대화방식과 표현법 등에 익숙해지면서 생각의 교환도 빨라지고 기획이 잘된 결과물들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글이 더 속 편하고 잘 맞는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많이 해왔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말이라는 소통 수단에 대한 중요성을 점점 크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기획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도 여기고 있습니다.


글과 말 이 둘은 각각 장단점은 있습니다. 글은 더 명확하고 정확한 생각을 전달할 수 있지만 그 점이 오히려 답답하기도 하고 명확한 생각의 한계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반면 말은 표현이 훨씬 더 자유롭고 제약이 덜합니다. 그만큼 더 열리고 큰 생각을 하는데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손발이 고생을 안하고 입만 좀 아프면 된다는 신체적 효율도 굉장히 크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아 물론 납득이 안되고 논리나 근거도 없는 말로하는 기획은 '입기획'이라고 공격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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