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갔다가 우연히 신년을 기념하는 캘리그라피 전시를 봤습니다. 수백개의 액자들 중 단연 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는데요. 과감한 굵은 선으로 쓴 ‘복’자가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세상 복은 다 가지고 있는 듯 부푼 모양의 글자는 그 어떤 설명도 없이 ‘복’의 의미를 잘 표현해내고 있었습니다.
2000년 초반에만 해도 캘리그라피(손글씨)의 전성시대라 불릴만한 시대가 있었죠. 디자인 프로젝트에서 없어서는 안될 트랜드였습니다. 새로 나오는 영화 타이틀은 죄다 캘리그라피가 도배를 하고, 서점에 가면 깔린 책 절반은 제호가 캘리그라피였어요. 마트 매대에 가면 식품 패키지 제목도 그랬구요. 그 때는 캘리를 안쓰면 뭔가 밋밋하고 허전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디자인 회사에서 시안을 만들 때면 일단 기본안으로 캘리가 들어간 시안을 제안할만큼 하나의 현상일 정도였습니다.
어느 순간 그 흐름이 디지털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다 묻혀버렸습니다. 캘리그라피의 전성기 때만 해도 훌륭한 캘리그파퍼를 찾고 확보하는 게 디자인 회사의 경쟁력일 때가 있었는데 말이죠. 심지어 캘리그라피 학원을 수강하는 디자이너도 많았죠. 하지만 이제 개인적인 취미가 아니면 그렇게까지 하는 디자이너는 많지 않을 겁니다.
요즘 보면 Ai 그림체에서 저는 캘리그라피 전성시대 초기 상황을 보는 듯합니다. 사실 아직 시작도 안했으니 곧 어마어한 파도가 몰려들겠죠. 사람이 흉내내기도 어려운 아트웍으로 디자인 트랜드를 잠식해 나갈거라는 걸 쉽게 예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디자인 회사에서도 의도한 표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능한 프롬프트 디자이너나 아티스트를 찾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되면 디자인 회사나 디자이너의 역할도 많이 달라질 듯합니다.
기술이 변하니 디자인 트랜드가 변하는 걸까요? 우리 생각이 변하니 거기에 맞춰 기술이 만들어지는 걸까요? 정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기술이든 트랜드든 디자인이든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디자이너가 트랜드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좋은 생각과 아이디어도 필요하고 동시에 기술에 대한 이해와 습득도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