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1시니까 12시 20분에 집에서 출발하면 돼"
"나는 몇 시간 전에 가서 기다려야 하는데..."
"아 진짜! 왜 그렇게 미련한 짓을 해! 시간에 맞춰서 가면 되지"
며칠 전에 엄마가 우리 집에 다녀가셨다. 2년 전 이곳에서 대장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은 후 정기적인 진료가 있어서 오신 거다. 엄마를 만나고 나면 '좀 더 잘 대해드릴걸' 하고 매번 후회를 한다. 이번에는 조심했는데도 가시기 직전 짜증 섞인 잔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항상 처음 이틀 정도는 조심스럽게 대하다가 3일째 정도 되면 습관처럼 막 대하게 된다. 미련할 정도로 착하디 착한 엄마의 인생이 매번 숨 막히고 답답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느 딸과 친정 엄마처럼 친근하고 편안한 사이가 아니다. 엄마에게 있어 나는 다섯 명 중 유일하게 믿음직하고 자랑스러운 자식이지만 어렵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잔소리 한마디에 아무 말 못 하고 움츠러드는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도 모르게 언젠가부터 바른 소리, 듣기 싫은 소리만 하는 나쁜 딸이 되고 말았다.
엄마를 향한 나의 잔소리와 쓴소리는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왜 이렇게 살아? 그냥 이혼을 해! 저런 남편과 지금껏 어떻게 살았어?"
부모님이 심하게 부부싸움을 할 때면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차라리 이혼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판소리를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집에는 일 년에 몇 번만 오셨다. 어떤 여자에게 정신이 팔려있을 땐 몇 년씩 안 오기도 했단다.
엄청난 바람둥이에 처자식은 나 몰라라 했던 아버지, 그런 남편을 끝까지 놓지 못하는 어머니. 어릴 적에는 가끔 보는 아버지가 그리웠으나 막상 보면 어려워서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었다. 내게 애교가 있었던 것도 아니라 어쩌다 한번 보는 아버지와 쉽게 친해지기란 어려웠다. 그러다 철이 들면서부터 엄마의 삶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싹텄다. 당시 일기장에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 미움 등을 고스란히 쏟아 내었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로 인해 상처 받았으나 그 사랑이 고픈 사춘기 소녀의 발악과도 같은 외침이었다.
아버지의 수많은 여자들 중 끈질기게 매달렸던 한 여자는 자식을 두 명이나 낳았다. 하필 그것도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와 한 살 어린 남동생을 말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엄마가 그렇게 사정하고 애원해도 유부남에게 들러붙던 여자가 중학교 2학년 때 두 자식을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우리 엄마가 2년 넘게 그 자식들을 키워야 했다.
남편이 바람피워 낳은 자식을 2년이나 키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도대체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창 예민한 사춘기 때라 엄마에 대한 답답함과 안타까움,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커질 대로 커져버린 증오와 분노는 고스란히 한 살 많은 언니에게로 향했다. 엄마가 하지 못했을 심한 말과 욕은 물론이고 때리고 발로 차며 밟기까지 했다. 나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을 뺏어가고 엄마를 힘들게 한 장본인이었기에 점점 모질게 대했다.
내가 학교도 입학하기 전,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언니를 집에 데려와서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인형처럼 예쁜 외모에 항상 아버지의 무릎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목이 콱 막히고 눈앞이 울렁거린다. 그런데 당시 그 모습을 봤던 엄마는 어땠을까? 나로서는 그 애들을 집에 데려오는 것조차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행동인데 말이다.
"너 클 때까지는 안돼"
아버지와 이혼하라고 할 때마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결혼식장에 아버지도 없이 어떻게 들어가냐는 거였다. 남편이 이렇다면, 결혼이 이런 거라면 나는 절대 하지 않을 건데 결혼식장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차마 엄마한테 그런 말은 못 하고 "그럼 나 결혼하면 바로 이혼해!"라고 말하곤 했다.
엄마는 나의 지속된 권유에도 불구하고 3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끝내 이혼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그토록 미워하더니 돌아가시고 나자 매일 밤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지금도 아버지 얘기를 꺼내면 눈물을 보이신다. 엄마는 여전히, 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신다.
언젠가 엄마한테 물은 적이 있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 자식들을 키운 거야?"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니? 다 네 아버지 잘못인걸"
"그럼 걔네 엄마하고는 왜 아직도 연락하는 건데?"
"네 작은 엄마도 불쌍한 여자야. 아무도 없는 고아거든"
"......"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작은 엄마라고 부르는 게 싫어서 '그 여자'라고 지칭하곤 했는데 엄마 입에서는 잘도 작은 엄마라는 소리가 나온다. 이렇게 착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동시에 이런 바보가 또 어디 있을까? 착한 엄마한테서 태어난 못된 나는 결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사랑하기에 그런 엄마가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엄마를 볼 때마다 "제발 그렇게 착하게, 성실하게만 살지 마!"라고 잔소리를 퍼붓는 것이다. 엄마는 나의 이런 마음도 모른 채 성질이 더럽다고만 생각하시겠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수십 년 만에 배다른 언니와 동생을 만났다. 몇 시간은 말도 안 하다가 동생이 먼저 알은체를 하자 두 손을 잡고 "너네 엄마 잘 모시고 잘 살아라" 하고 나름대로 덕담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언니와는 마지막까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침내 모두들 인사하고 헤어지기 직전, 용기를 내서 언니를 안아주고는 "잘 살아" 한 마디를 건넸다. 끝까지 모른 척하고 헤어지면 예전에 내가 했던 못된 짓들이 평생 가슴에 남을 것만 같았고 마지막 인사조차 하지 않은 속 좁은 내가 용서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 그리고 배다른 언니와 동생.
나는 그들을 사랑하고 동시에 증오한다. 사랑하고 싶었는데 마음껏 사랑할 수 없었기에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본처와 자식들을 잘 돌보며 현명하게 처신했더라면 우리도 잘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깝다. 그리고 내가 좀 더 큰 사람이었다면, 엄마처럼 착했더라면 진즉에 증오보다는 사랑을 더 키웠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그들을 다시는 볼 수 없고 보지 않을 거지만 마지막까지 전하지 못한 부질없는 내 마음을 글로나마 전해 본다.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안녕하세요 저는 <일류두뇌>와 <당신의 뇌를 바꿔드립니다>의 저자인 일류작가 강은영입니다. 브런치에 썼던 글들로 세 번째 책의 퇴고를 마치고 지금은 자유롭게 글을 쓰는 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