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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류작가 강은영 Nov 05. 2021

내가 없는 세상에서도

남편에게 쓰는 유언장

8년 반동안 연애하고 16년 넘게 부부로 산 나와 당신, 미성년자 딱지를 떼자마자 만나 어느덧 서로의 흰머리를 짠하게 바라보는 중년이 되었네요. 인생의 반 이상을 공유해온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백발에 굽은 등으로 혼자 남은 나나 당신을 떠올리면 눈물샘 버튼부터 켜진 답니다. 한날 한시에 가는 건 아이들한테 못할 짓이니 부디 한 사람씩 떠납시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 당신은 어떨까요? 혼자서는 두 아들을 키우기 힘들 테니까 어머니를 모셔와서 같이 살아요. 연애를 하더라도 재혼은 애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 했으면 좋겠어요. 혼자서 살라는 말은 못 하겠네. 나를 그리워하다 외롭게 생을 마치는 것보다는 나 없이도 행복하게 살다 웃으며 다시 만나길 바라니까요. 



아이들하고는 내 얘기를 많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엄마가 대학생 때 어땠는지, 니들을 낳고 나서는 어땠는지, 어떤 걸 좋아하고 잘했는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다요. 결혼하면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살아야 하고 니들이 좋아했던 음식을 잔뜩 해서 택배를 보낼 거라는 말도 했었다고 전해주세요. 며느리한테 직접 갖다 주는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쿨한 면모도 꼭 전해야 해요. 엄마에겐 니들이 전부였다는 말도.


내가 없어도 부디 삼시세끼 잘 챙겨 먹고 당신이 좋아하는 운동도 하고 아이들과 여행도 자주 다녔으면 좋겠어요. 여행 갈 장소와 일정을 정하는 일은 이제 당신 몫이겠네. 비행기와 숙소만 예약하면 고생문 입장이라는 걸 명심해요. 그동안 내 덕분에 얼마나 편하게 여행을 다녔는지 사무치게 느껴봐요. 애들이 더 크면 맡겨도 좋겠고.    


내가 없는 세상에서 당신은 많이 힘들겠지만 금방 익숙해질 거예요. 너무 괴롭다면 고통이 가실 때까지 나에게 편지를 써줘요. 그렇게 쏟아내고 비워내면 조금은 가볍게 살 수 있을 테니까요. 글을 쓰면 보다 쉽게 이겨낼 거예요. 작가라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글쓰기에는 엄청난 치유의 힘이 있단 말이에요. 당신이 아직 그걸 몰라서 참 안타깝네. 


당신과 애들이 사는 가까운 곳에 나를 묻어줘요. 우리 민성이랑 함께 있고 싶지만 거긴 너무 외지여서 쉽게 찾아가기 힘드니까 욕심은 접어 둘래요. 살아있는 사람이 우선이지 않겠어요. 내가 보고 싶거나 문득 생각나면 보러 와줘요. 경치 좋은 수목장 같은 곳이 좋겠어요. 산책하듯이 마음 편히 다녀갈 수 있게. 우리 둘이 손잡고 산책했던 날들을 그리워하며 낭만을 즐길 수 있게.  



나는 부모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자식복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내가 가진 복 중 가장 확실한 건 바로 남편복이에요. 언니들이 나한테 복도 많은 년!이라고 할 때마다 속으로 맞아 맞아! 맞장구를 쳤어요.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결혼을 안 했을 거고 참사랑을 주고받는 것도 몰랐을 거예요. 당신 덕분에 뜨거운 사랑을 했고 예쁜 아이들도 낳고 남부럽지 않은 결혼 생활도 했어요. 


내가 하는 건 다 믿어주고 밀어주었던 당신 덕분에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하며 살 수 있었어요. 한 가지에 미치면 정신을 못 차리고 빠져드는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도 마지막에 미친 게 글쓰기라 얼마나 다행이에요. 돌이켜보니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당신을 만난 것이고 두 번째는 책을 쓰고 작가가 된 거예요.  


몇 년 전,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난 오늘 당장 죽어도 괜찮아요. 아이들이 걸리긴 하지만 매일 열심히 살아서 아쉬울 것도 후회할 것도 없어."라고 했을 때 당신이 내게 처음으로 "멋있다"라고 했던 거 기억해요? 멋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언젠가부터 그게 삶의 모토였어요. 뭔가 대단한 걸 이루거나 엄청난 행복을 바라는 대신 내게 주어진 하루를 즐겁게 열심히 살아내는 것, 그걸 할 수 있던 것도 다 당신 덕분이에요.


당신을 만나서 내 삶이 풍요롭고 행복했습니다. 당신처럼 멋있는 사람과 함께 살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무표정하고 무뚝뚝했지만 다정하고 따뜻했던 당신을 내 영혼에 고이 담을게요.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을 테니 우리 꼭 다시 만납시다! 우스갯소리로 했던 것처럼 다음번에는 내가 남자, 당신이 여자가 되어 만나도 좋겠어요. 그때는 당신한테 미칠게요. 사랑합니다 사재철 씨     


             


*이 글은 새글캠(새벽 글쓰기 캠프) 주제로 쓴 글입니다. 함께 글쓰며 치유하고 성장하실 분은 새글캠해요!^^

https://blog.naver.com/frigia0/222685674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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