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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류작가 강은영 Nov 04. 2021

내가 다 망쳤다!

남편의 생일

남편의 생일은 음력 9월 21일이다. 라떼는 말이야! 음력 생일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음력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생일은 똑같은데 왜 엄마 아빠 생일은 해마다 바뀌냐고 물었다. 그래서 3년 전쯤부터 아이들이 기억하기 쉽게 양력으로 바꿨다. 남편의 생일은 11월 2일, 112를 기억하자!


엊그제가 남편의 45세 생일이었다. 기억력 하나는 끝내주는데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곧 다가올 결혼기념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나 보다. 그날 아침, 갑자기 남편이 자기 생일 아니냐며 황당함과 기분 나쁨을 온몸으로 표출했다. 어떻게 생일을 잊어버릴 수 있냐고 타박하는 듯해서 순간 기분이 상했다. 당신도 내 생일 까먹고 잘 안 챙겨주지 않느냐며 쏘아붙였다. 미안하고 민망해서 못 견디겠는데 남편이 너무 기분 나빠하니 반감이 올라왔다.  



장애아인 둘째를 한창 힘들게 키우던 시절, 남편은 내 생일을 잘 챙겨주지 않았다. 서로 마음의 여유라곤 없을 때라 서운해도 속으로 앓고 그냥 넘어가기 일쑤였다. 그게 얼마나 마음에 맺혀 있는지 남편은 모를 거다. 연애 시절, 자칭 타칭 로맨티시스트였던 남편은 잊지 못할 편지와 선물을 주곤 했기에 더 서운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생일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라고 애써 합리화를 했다. 남편이 직접 미역국을 끓이고 생일상을 차려주고 선물을 해줄 때도 있었는데 챙겨주지 않았던 날이 더 크게 남아있는 걸 보면 나는 아직도 한참 모자란 인간이다.


아이들이 기억하기 쉽게 하려고 바꾼 생일인데 나도 아이들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오전 운동을 마치고 서둘러 소고기를 사 와 미역국을 끓이고 밤호박 튀김을 해서 점심을 먹었다. 미안한 마음에 저녁에는 더 푸짐한 상을 차려줘야지 마음먹었다. 미리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맛있는 요리밖에 없었으니까.


오후 운동하러 가기 전에 미리 잡채와 불고기 재료, 떡 등을 사 왔다. 근력 운동을 한 시간 반 정도 하고 집에 오자마자 씻지도 않고 폭풍 요리에 들어갔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꾹 참고 생일상을 차려냈다. 상다리 부러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제법 그럴 싸한 상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다 먹을 즈음 남편이 아침 이야기를 꺼내는 거다.


미안하다고 하면 되지 어째서 자신을 타박했냐고. 남편의 태도를 보고 기분이 나빠져서 그랬다고 하니 변명하지 마란다. 내 대화법을 지적하는 걸 듣고 있자니 점점 열이 올랐다. 너무 미안하고 민망해서 말하지 못한 것도 있는데... 그래서 땀범벅을 하고는 허리 통증을 참아가며 요리를 했는데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큰 아들이 학원에서 돌아오자 케이크 컷팅은 삼부자끼리 하라 하고 잠을 청했다. 새벽 3시 반에 일어난 데다 운동을 3시간가량 하고 생일상까지 차려냈으니 지칠 만도 했다. 무엇보다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줄 수 없었다. 가만히 누워 거실에서 들려오는 막내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눈물이 절로 났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를 여니 케이크가 그대로 있었다. 내가 망쳤구나! 순간 욱하는 마음 참고 미안하다고 했으면 됐을 것을. 급하게나마 편지, 선물을 준비한 아이들과 여느 때처럼 행복한 파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남편의 생일을 내가 다 망치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자존심은 24년을 함께 해온 남편에게는 쓸데없이 잘도 발동한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괜찮아요, 죄송해요. 마음 그릇이 태평양인데 남편 한정 우물물이다.  


하루가 더 지난 어제저녁, 종일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는데 남편이 식탁에 앉자마자 "어제는 화내서 미안해"라고 했다. 난 아직 다 풀리지 않아서 묵묵히 밥만 먹었다. 그런데 생일 까먹은 게 그리 큰 잘못인가? 남편은 아직도 바꾼 내 생일 날짜를 몰라서 얼마 전에도 물어보았는데. 내 논리는 이런데 남편은 따져 물은 내 태도가 맘에 안 든 거였다. 좌뇌형과 우뇌형의 차이가 이럴 때도 드러난다. 부부 사이는 가깝고도 참 멀다. 


똑같은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기 위해 스마트 폰 달력에 남편 생일을 입력하고 매년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해놨다. 기계한테 의존하는 건 싫지만 남편 생일을 수시로 까먹는 부인이 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내년 생일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남편의 생일을 망치고 나서 편안하고 익숙할수록 더 노력하고 잘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었다. 우리는 아직도, 어쩌면 죽고 나서도 서로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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