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수영을 처음 배울 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물 공포가 있는 나에게 물 위에서 편안하게 힘을 빼고 떠 있거나 물속에 깊이 들어가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큰맘 먹고 도전했기에 긴 호흡은 안돼도 머리를 물속에 집어넣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배영을 배우기 위해 물 위에 누워야 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수영장에 나갈 수 없었다. 물속에 들어가 호흡하는 게 어려울 줄 알았는데 물을 보지 않고 떠 있는 일이 훨씬 더 큰 공포심을 안겨 주었다.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처음 시도한 수영은 한 달만에 끝나고 말았다. 어지간해서는 쉽게 포기하는 내가 아닌데 아마 첫 도전에 포기한 것 중 유일한 게 수영일 것이다. 막연한 두려움이 있는 상태에서는 시작조차 어렵고 시도하더라도 두려움에 굴복하기 쉽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시도조차 하지 않거나 조금 해보다가 포기하고 만다.
누구나 해보지 않은 걸 처음 시도하면 대체로 두렵고 서툴며 낯설다. 뇌는 명확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복잡한 길이라도 익숙한 길이라면 헤매지 않고 목적지까지 잘 간다. 딴생각을 하다 잘못 들어섰다 하더라도 머릿속에 이미 지도가 있기에 문제없다. 하지만 처음 가 본 곳이라면 모든 게 낯설고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조차 헷갈린다. 경험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은 당연한 반응이다.
1년 전, 똑녀똑남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두뇌를 활용한 습관 만들기를 주제로 초고를 쓰면서 내 노하우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사례 모집도 하고 싶었다. 온라인 프로젝트에 참여해 본 적이 없는 데다가 줌 회의조차 낯설고 서툰 상태에서 4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매주 한두 번씩 줌 강의를 하며 개개인의 체크리스트를 피드백하는 등 난생처음 해보는 일들을 해나갔다.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사람들에게서 성과가 나올지도 불분명했다. 막연한 두려움 속에 그저 앞이 보일 때까지 계속 해나는 수밖에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 첫 참가자들의 반응이 좋아 한 달 프로젝트가 1년으로 늘어났고 코로나 사태로 집콕만 하던 때라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종일 컴퓨터와 휴대폰을 보며 살아야 했지만 하는 일에 비해 수입은 매우 적었다. 단 몇 시간 일하고 우아하게 쉬면서 돈을 버는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었지만 현실은 '디지털 노가다'라며 자조하곤 했다. 내가 과연 일 년 동안 끌고 갈 수 있을지, 매달 회원이 모집은 될지 앞이 전혀 보이지 않고 캄캄하기만 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수많은 것이 달라졌다. 우선은 1년간 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이다. 한발 더 나아가 보다 업그레이드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시행 중이고 수입도 5배나 늘어났다. 무엇보다도 나를 믿고 따르며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 가장 큰 성과이다. 온라인 교육 시장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어떤 것도 보이지 않은 두려움에 한발 내딛기가 어려웠는데 매일 그냥 하다 보니 점차 길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만큼이나 성장했다.
몇 년 전에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다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애들이 물에 빠졌을 때 엄마인 내가 쳐다만 보고 있거나 같이 빠져 죽을 순 없으니까. 모성애가 물 공포보다 더 강했는지 이번에는 끝까지 해냈다. 배영을 배울 땐 무섭긴 했지만 고비를 넘겼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무섭거나 죽을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에는 물 공포만 이긴 것이 아니라 수영반 에이스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수영을 즐기고 잘하게 되었다. 그토록 두려웠던 물이 즐거운 놀이터가 될 수 있다니! 다시 떠올려도 놀라운 일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코로나 사태로 교육 시장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다. 모든 게 불확실해서 막연하고 두려웠지만 혼자 힘으로 1년 간 쉬지 않고 온라인 교육을 하며 길을 개척해온 나는 2022년이 더욱 기대가 된다. 여전히 망망대해에 놓여 있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나와 결이 비슷한 많은 사람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물 공포를 이기고 수영을 즐기게 된 것처럼 온라인 교육 공간이 즐거운 놀이터가 될 거라는 설렘이 있다. 두려워도 떨리고 설레어도 떨리긴 매한가지.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떨지라도 나에게는 분명, 설레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