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릴리 Sep 21. 2024

들어가는 말_내 이름은 이형편

  내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도대체 왜 나를 낳아서 못 볼 것들을 보게 하고, 겪지 않아도 될 마음고생을 시키는 건지 부모님을 증오했었다.


  매일밤 잠들기 전까지 가장 고통 없이 죽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고, 언제 어떻게 실행할지에 대해 고민하다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다.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부모님이 슬퍼하기는 할까 수도 없이 괴로워했었다.


  7살 무렵부터 그랬던 것 같다. 가정폭력이 성행하던 시대적 배경도 한몫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를 때리는 것에 대해 별 죄책감이 없어 보였다. 어머니도 힘에서 아버지에게 밀릴 것을 알면서, 언제나 똑같이 덤비곤 했다. 제발 누가 와서 좀 도와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었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었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초중고 시절을 거치면서도 부모님의 다툼은 변함없었다. 늘 갈등 속에 놓인 부모님 사이에서 나는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맸고, 불안에 떨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새벽까지 밖으로 나돌았다. 밤새 놀이터에서 친구들에게 신세한탄을 하며 소주를 마시기도 여러 날이었다.


  집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나는, 타인에게 내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러려면 겉으로 보여줄 것이 있어야 했다. 공부를 잘하거나 옷, 용돈 등등. 하지만 공부는 특출 나지 못했고 나는 늘 돈이 없었다. 주머니에 돈을 가지고 다닌 기억이 없다. 항상 빈 주머니로 다녔다.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나는 언제나 거지였다. 학교육성회비나 기타 등등의 비용들을 제때 내지 못해 교무실에 자주 불려 갔다. 그럴 때마다 담임선생님에게 솔직히 형편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었는데, 나중에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이형 편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학교 매점에서 친구들이 흔히 사 먹는 500원짜리 햄버거 하나 사 먹을 돈이 없었다. 나는 언제 저 햄버거를 먹어볼 수 있을까 생각하던 어느 날, 지각 반성문을 잘 못써서 계속 반복해서 다시 쓰고 있는 친구에게 다가가, 내가 대신 써줄 테니 햄버거 하나만 사달라고 해서, 반성문이 통과되고 햄버거를 얻어먹기도 했다. 그 친구는 너무 고맙다며 2개를 사줬다.


  사춘기에 옷에 민감한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늘 같은 PK티셔츠 하나를 빨고 또 빨아서 매일같이 같은 티셔츠에 같은 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그게 너무 창피해서 어떻게든 메이커 옷과 신발을 갖고 싶어 했고, 가져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때는 메이커를 못 입으면 돈 없는 집 자식이라는 또래의 놀림을 받고 어딜 가든 주눅들었던 때였다.


  가족관계와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아버지는 신용불량자에 주민등록말소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주민등록에 실릴 곳이 없어, 집주인 등본에 동거인으로 올라간 적도 있다. 그게 초등학교 4학년때의 일이다.


  그때 새엄마가 집을 나갔고, 친엄마와 다시 합칠 무렵이었는데, 그때의 기분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좋았지만 불안했던 것 같다. 또다시 싸우고, 돈 때문에 지지고 볶고, 아버지는 또 도박을 할 것이었고, 뻔한 반복일 것 같아 두려웠던 것 같다.


  아버지는 자주 희망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했지만, 실제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역시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질 않았고, 결국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엄마와 함께 집을 나갔다.


  오랜 시간 아버지를 증오했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아버지가 미치도록 싫고 미웠다. 꼭 못살아서만은 아니었다. 가난해도 행복하게 잘 사는 집들이 주위에 많지 않은가. 그것보다는 서로를 원망하고 탓하고 미워하는 것이 싫었다. 그게 내 가족이라는 것이.


  엄마와 아버지는 서로의 탓을 하며 긴 시간을 함께 살았다. 나 역시 그런 부모님 탓을 하며, 풀리지 않는 나의 앞길과 진로를 합리화시켰다.


  성인이 된 후 어느 날, 내가 집을 뛰쳐나가기 전날밤, 나를 앉혀놓고 한창 자기주장, 설교만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그동안 설움이 북받쳐 올라와 터트렸었다. 어떻게 부모자식으로 만나서 단 한 번을 살갑게 서로 위해주지를 못하고 으르렁거리기만 하냐고, 도대체 왜 우리 식구는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는 거냐고 펑펑 울면서 이야기했었다. 그때 아버지는 동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나에게 문제가 있으니 정신과에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너는 인생 낙오자이고, 정신적으로도 심각하게 안 좋은 상태인 것 같다고.


  이 시집에 담긴 시들은 나를 위해 쓰기 시작했다. 나의 아픈 과거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서 그때의 감정들을 되새겨보고, 스스로 치유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시들을 써 내려가다 보니, 아버지가 그렇게 나 사람만은 아니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놀라운 생각이었다. 아주 오래 아버지를 증오했었고, 내 인생이 이렇게 막장으로 가고 있는 것은 다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버지를 그저 한 사람의 남자로 보고, 어머니도 한 사람의 여자로 보면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희미하게 들기 시작했다. 사실 주말드라마나 다름없는 뻔한 스토

리로 전개된 가족 사지만, 그것도 다 우리 가족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썼다. 좋았던 기억은 좋았던 대로, 나빴던 기억은 또 있는 그대로 다 써 내려갔다. 시는 내 인생에서 만난 최고의 친구인 것 같다. 대학에서 시라는 과목에서 F에 가까운 학점을 받던 내가 좋은 은사님을 만난 것은 정말 행운 중에 행운이었던 것 같다. 그 시기에 나는 시에 대해 어떤 느낌 같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좋은 시인들의 시를 하나씩 읽어 나갔다.


  어려웠지만 나는 더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내가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은 꼭 부모님 탓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시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솔직한 나를 만나러 가는 첫 번째 문이 열렸다. 피하지 않고 원망과 두려움에 고통받고 있는 어린 나와, 상처받은 그대로의 나를 만나러 가려고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