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아, 그 말을 하지 마오
병원 노동자들 사이에는 오랜 금기어가 있다. 의학 드라마에서도 곧잘 등장하는 에피소드인데, 미드에도 나오는 걸 보니 세계 공통인가 보다.
“오늘 정말 한가하네. 근무 끝날 때까지 쭉 이랬으면 좋겠다.”
한가한 스테이션의 분위기에 취한 누군가 무심코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날의 근무는 폭망이다. 런던의 센트럴파크처럼 한가롭고 평화롭던 병동은 기다렸다는 듯 맨해튼의 증권사로 바뀐다. 전쟁이다.
세계공통의 의료진 금기어에 대해서는 4학년 마지막 실습, 응급실에서 실습할 때 들었다. 수액만 다 맞으면 집에 가는 환자를 제외하고 모든 침대가 비어 있었다. 의료진에게는 잠깐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때 한 선생님이 “근무 끝날 때까지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그래도 이제 곧 집에 갈 환자 한 명 밖에 없긴 하니 얘기 하는 거야. 환자가 아예 없는 때가 있는데 이런 걸 ER(emergency room. 응급실)에서는 white bed라고 불러. 그땐 숨 좀 돌리는 거지. 집에 갈 때까지 이 상태 유지하면 진짜 좋겠다. 너희들 마지막 실습 기념이기도 하니까 사진 같이 찍자.” 하고 그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 white bed 상태를 유지하던 날이었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임상(병원에서 일하는 것)에서 일하면서 한가하다고 생각해도 근무가 끝나기 전에는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는 조언을 해 주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남은 근무시간은 망할 거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잊었다.
입사 2년 차. 액팅(acting) 간호사가 아닌 차지(charge) 간호사로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acting nurse, charge nurse. functional 근무. 이것 또한 매우 할 말이 많으므로 다른 글에서 써 보려고 한다.) 그 일이 일어난 날은 이브닝 근무였다. 우리는 부재 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교대로 직원 식당에 내려가 식사를 ‘마시고’ 오는 일이 상당하고, 심지어는 먹지 못하는 날이 허다하다.
그날은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날이었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오늘은 오더도 다 받고 할 일 다 했어요. charge 독립하고 처음으로 한가하게 일하는 것 같아요.” 하고 같이 저녁을 먹는 선생님께 이야기했다. 우리의 금기어를 내뱉은 그 순간에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왜 내 입을 막지 않았지?)
저녁을 먹고 병동으로 들어서는데 내 담당 병실 쪽으로 다른 선생님이 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 왜 저러시지?’ 하고 병실로 갔는데 내 환자가 저녁을 먹다 말고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보호자가 밥을 먹이다 사레가 들렸는데 숨을 못 쉬고 있었다. 숨이 넘어가고 있는 환자의 얼굴이 파랬다. 내 얼굴도 파랬겠지. 머릿속은 하얘지고 손은 떨렸다. 내 환자가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 처음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전공의 콜을 했는지, E-Cart(emergency cart. 응급카드. 심폐소생술을 할 때 필요한 모든 약품과 물품이 있다), patient monitor(환자 모니터. 심전도, 산소포화도, 심박수를 확인할 수 있는 모니터)를 끌고 환자에게 왔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담당 레지던트가 바로 오고 기도삽관을 시작했다. intubation(기도삽관) 어시를 하고 ambu-bagging을 하며 중환자실로 밀고 들어갔다.
망했다.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그 환자는 다행히 산소 포화도가 회복되고 다음날 병실로 올라왔다. 우리 모두의 금기어를 입 밖으로 꺼내서 생긴 일 같았다. 사실 그런 건 전혀 아닌데 말이다.
그 뒤로는 절대 꺼내지 않는다. 누군가 말한다면 재빨리 막는다.
사진: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