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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밝음 Apr 08. 2016

원고지를 채워가는 밤

사진정보: 2014년 여름, 동경


삶의 무게는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시작되었다. 2학년 때나 만날 줄 알았던 숫자 2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것이다. 스케치북에 내 이름 따위나 큼지막히 적어보던 한가한 1의 시대가 저물고, 꼭 두 배만큼 무거운 2는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우선 부모님들이 해주시던 방과 후 청소를 우리가 담당하게 되었다. 금속탐지기 같은 빗자루로 바닥을 짚다 보면, 매일 하나 둘 사라지던 교실의 연필이며 지우개가 쇳덩이처럼 달라붙었다. 녀석들은 신나게 놀았는지 언제나 새카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장난꾸러기처럼 키득거렸다.


다른 하나는 2 하고도 0이 두 개나 붙은 원고지에 갇힌 것이다. 쇠창살 모양의 교도소 생활에는 규칙이 있었다. 아니, 많았다. 붉은 창살 틈새마다 한 글자만 써야 한다는 게 기본 원칙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나는"이라는 두 글자를 호기롭게 적어 보았다. '너'도 '우리'도 아닌, '나'라는 주어 만으로도 무한대의 우주 공간이 행성 하나로 좁혀졌다. 여전히 198개의 빈칸이 내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이번엔 "주말에 벚꽃을 구경했다."고 문장을 완성했다. 그러자 문장에선 봄볕이 환하게 쏟아지고, 글자에서 향기가 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놀라고 있을 사이 없이, 선생님은 문장부호를 알려주셨다. 큰따옴표에는 부모님과 나눈 대화를 적을 수 있었고, 작은따옴표엔 은밀한 생각을 담을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있었다니. 집게손가락을 만들어 보이며, 나의 전지전능함에 감탄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쇠창살의 무게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종이를 구겨 던지며 나이 든 시인을 흉내 냈다. 그러나 나는 옥살이가 체질에 맞았는지 빠르게 적응했고, 오히려 재미를 붙였다. 하루는 규칙을 잘 암기하고 있는지 시험을 치렀는데, 내가 1등을 차지했고 금박지가 번쩍이는 연필 한 다스를 받았다. 그때부터 빨간 쇠창살은 내 방의 또 다른 이름이었으며, 여기라면 얼마든지 갇혀 지낼 수 있었다. 만일 화장실 앞 게시판에 글짓기 대회 포스터라도 붙으면, 기꺼이 응모했다. 그중에서도 올림픽 공원에서 열리는 백일장이 가장 맘에 들었다. 서늘한 그늘 아래에 앉아 김밥을 먹고 나면, 색 분류표가 빼곡한 미술 화판을 받쳐 들고, 느른한 눈으로 5월의 봄을 읽어나갔다. 소슬한 바람결에 까닥이는 민들레의 가녀린 목은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을 닮았고, 분분히 날리는 꽃가루는 영화 '메리 포핀스' 속 아주머니 같았다. 5월의 들판에서는 식후에 뒤따르는 졸음만으로도 문장은 음표의 꼬리를 달았다. 고학년이 되자 검지 손가락 근육도 단단해진 건지, 아니면 200자 원고지의 칸이 조금씩 사라진 건지, 수상쩍을 정도로 수십 페이지쯤은 단숨에 써 내려갔다. 간혹 입상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았다. 비록 심사위원에게 내 글은 시시했을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내가 글을 쓰면 결과보단 노력에 수식어를 잔뜩 붙여 주셨다. 나는 그 은율을 들을 때마다 쾌감을 느꼈다.


글 쓰는 게 좋았던 것은 반들반들한 원고지의 질감, 움푹 파인 글자의 촉감, 빳빳한 상장에 붙은 금박지, 어머니의 감탄사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간혹 겨울 하늘이 잿빛으로 보이거나, 끝없는 심연으로 침전하는 꿈을 꾸었지만 이를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고통의 입술에서 부서져 흘러나오지 못한 말을 그림에 담아보기도 했지만, 크레파스를 들 때면 집게손에서 전능함이 빠져나갔다. 이때 필요한 것이라곤 연필 한 자루와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밭이었으며, 그곳에 끈적이는 진창을 잔뜩 봉인할 수 있었다.



사진정보: 2014년 여름, 동경 아사쿠사


저마다 원고지를
채워가는 밤이 있지


상상력과 감수성이 최고조에 이른 고등학생 땐 붉은 교도소에서 출소하여, 미니홈피 게시판에 세를 얻었다. 당시 마음속에는 고민과 상처들이 핏물처럼 엉겨 붙어 나를 숙주로 삼고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흉측한 것들을 열 손가락에 줄로 묶고 키보드 위에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게 하면, 꼭두각시 인형처럼 말을 잘 듣고 제법 예뻐 보였다. 덕분에 언제나 성황리였으며, 게시판 조회 수가 200을 넘곤 했다. 그러면 나를 좋아하는 여자애가 도대체 몇 명일까 궁금했다. 한두 명의 여자애가 100번씩 클릭해줬다면 100만큼 행복했겠지만, 수십 명이 100을 갉아먹었단 사실을 알곤 기쁨이 반감되었다. 그나마 위안이었던 것은 다른 반 친구들 사이에서도 내 글이 회자된다는 것이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괴상한 생각들을 풀어놓지 말라곤 했지만, 의사 앞에서처럼 나에게 하얀 치열을 드러내는 친구들이었다. 덕분에 신이 난 괴물들은 점점 더 증식해 나갔다.


여전히 글쓰기는 좋아했지만, 국어시간에 대한 흥미는 떨어졌다. 사용된 수사법이 무엇인지, 또는 어느 시인이 저항시인인지 행여 칠성파여도 나와는 상관없는 것들만 배운 까닭이다. 시험에 나온다며 받아 든 누런 종이에는 '좋은 문장의 요건'이 인상 좋은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도대체 '좋다'는게 무엇인가. 간결함이나 적당한 수사법이란 것은 대체 어떤 글을 쓸 때 필요한 요건인가. 불분명하고 뭉툭함에 많은 의문을 가졌다.


내 세계관이 개성 없이 쪼그라들 무렵. 키팅 선생님(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이 나를, 네모난 모니터에 찾아왔다. 그리곤 'A 시(詩)는 80점, B는 75점이라고 평가 내릴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 무렵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조그만 내 방을 찾아왔다. '글은 간결해야 한다'며 빗장을 건 누군가의 깐깐한 입매와는 달리, 끝없이 늘어지는 수식어구와 문장에 놀라웠다. 동시에 모든 현상과 의식의 흐름까지 치밀하게 좇은 문장은 감동스러워서, 읽기 어려운 문장을 두 번씩 읽는 바람에 시간이 더디 걸렸다.


키팅 선생님과 프루스트를 접하고 나서야 내 사춘기는 끝이 났다. 이제
남의 귀가 아닌,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구별되는 목소리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속죄할 대상이 떠나가고 자리에 짓눌린 회한(悔恨)들, 나를 단죄(斷罪)하는 날이 선 초승달, 그리고 절망에서 비로소 배운 겸비(謙卑). 앞서 언급한 것들의 가없는 순환과 떠오르는 상념을 심상과 연상하고 고찰했다. 그것이 삶의 변성기를 겪고 얻은 목소리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붉은 쇠창살에 가둬두는 것은 아닐까 하고. 하루를 마친 퇴근길 버스, 떨어져 있는 사람과 통화를 마친 텅 빈 방, 시끄러운 술자리가 끝나고 몸을 뉘인 끈적한 택시 시트에서, 불 꺼진 침대 위 두 호수만 영롱이는 밤. 저마다의 원고지를 써 내려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내가 과거에 봉해둔 글도 스산한 봄바람에 자유를 찾아, 흐드러졌다가 흐트러지는 밤이다.


글과 함께한 음악♪ (가수-음악)

* D`Sound - Close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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