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3세계를 여행할 때마다 죄의식이 드는 것은, 그들을 일정 부분 동물원의 동물들과 어느 정도 등치에 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느 여행자는 제3세계 자연 그대로의 풍광을 보기 위해, 또 다른 여행자는 제3세계의 순수한 사람들을 엿보기 위해 여행을 한다.
우리가 여행을 소비하는 방식은
대부분 찌든 도시 생활을 떠나
돈을 쓰며 휴양을 하기 위함이 크다
나 또한 현대 문명이 만든 허구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지쳐서 왔음을 부인할 수 없고, 이곳의 여행자들도 값비싼 카메라에 이질적인 무언가(사실은 비 문명화된 무언가)를 담아 소셜미디어에서 소비할 공산이 크다. (이 또한 나…)
이 시점에서 그럼 우리가 얼마나 문명이란 이름의 허구적 사실에 허우적거리며 사는지 생각해보자. 사실 본래 우리는 태초에 풀을 뜯어먹고, 사냥을 하며, 추위와 더위를 피하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목적으로 살지 않았나. (그때야 말로 진정한 카르페 디엠적 삶이 아니었을까. 오직 오늘만을 위하여!)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농업혁명이 일어나고, 정착을 시작하면서, 잉여적 생산물의 양적 정도에 따라 신분을 구분하지 않았던가. 이젠 제법 시간이 흘러 (사실 인류 전체의 나이로 따지자면 우리가 굶주림에서 벗어난 지도 불과 일백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우리는 학력과 연봉, 통장에 찍힌 숫자가 전부인 냥 살아가고 있지 않나.
현대 문명인의 시각에서 라다크의 삶은 무가치하다고 볼 수 있다. 불과 십 수년 전까지 유지되어 온, 라다크의 자급자족 경제체제는 절대 경제적 수치로 환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이든 노동력이든 화폐로 주고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GNP GDP 등에 집계되지 않는다.
모든 가정이 보리와 채소, 과일을 재배할 수 있는 자기의 땅을 소유하고 있고, 입고 신고 쓰는 모든 의복을 직접 만들어 쓰며, 사는 집 또한 주변의 흙과 돌을 이용해 짓고 있으니 사실상 화폐가 무의미하다. 또 모든 주민이 서로 필요할 때 상부상조하기 때문에 더욱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라다크의 자급자족 경제체제는 인류가 꿈꾸던 삶과 거리가 매우 가깝다.
의식주가 모두 한 자리에서
해결되는 꿈의 삶
인도 정부와 다른 선택을 한 부탄은 GNP 대신 GNH (Gross National Happiness)을 따르고 있다. 경제적 기준으로 인간의 삶을 볼 경우 자연의 파괴되고 삶이 황폐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진보 대신 행복을 택한 것이다. 부탄을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짐작 건데 라다크 청년들처럼 서구식 문화가 그들의 고유 전통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상대적 열등의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수치보다 그들이 지닌 정서적, 정신적 풍요로움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을 것을 확신하다.
과연 문화의 다양성, 이를 넘어 사는 방식에 대한 다양성은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부탄처럼 제한적으로 수문을 여는 것이 해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왠지 미래에 라다크의 전통적 삶의 방식을 하나의 관광상품화할 것 같은 암울한 모습이 상상된다.
레에는 이상하리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다. 정말 이스라엘 인구가 800만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어딜 가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메뉴판에 이스라엘 메뉴가 있을 정도.)
내 분석인데 이런 현상(?!)은 트래킹 코스가 있는 지역일수록 심해진다. 네팔의 안나푸르나에서도, 미얀마의 껄로에서도 유독 이스라엘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라가 작아서 답답해서 일까, 아니면 국민 대다수 군대를 다녀와 몸 쓰는 걸 좋아하는 것일까, 여전히 의문이다.
분명한 건 우리나라 사람들 만큼이나 모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3박 4일의 투어를 마치고 우리는 제법 친해졌다. 특히 한국 문화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던 그들과, 이스라엘에 대한 편견을 가졌었던 나는 밤새 카드를 치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 빼고 모두 군대를 다녀온 터라 군대 얘기를 제일 많이 했던 것 같다.
군대 얘기는 공대 다녔을 때부터 지겹게 들었지만 이상하게 말하려고 하니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러던 중 순간 전원책 아저씨가 떠올라서 ‘한국의 일부 남성들이 여자도 군대를 가야 한다’ 주장한다 했더니, 놀랍게도 이스라엘에서도 ‘왜 여자는 2년밖에 복무를 안 하냐’는 식의 푸념이 있다고 한다.
팔레스타인과 중동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사실 졸아서) 호기롭게 강한 어조로 묻지 못했다. 다만 그들은 국토를 되찾은 지 70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후대를 위해 열심히 싸워야 한다는 말해주었다.
지프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인 금요일은 유대인의 집에서 안식일의 예배가 있는 날이라고 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여행 중에 그것도 인도의 조그만 동네에서 예배를 한다는 말인가. 궁금한 마음에 눈이 동그래져 계속 캐물었더니 한나가 마지못해서였을까, 한번 와보겠냐고 물었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있는 다른 유대인 친구들에게 의사를 물었더니 다행히 와도 좋다고 한다.
설레는 마음에 숙소에 돌아와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할까,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면 이슬람을 연상시켜서 싫어할까’ 등 별의별 잡다한 공상을 한 뒤 나름 깔끔하게 차려 입고 예배에 참석했다. 유대인의 집을 표시하는 것은 이스라엘 국기였다. 그 외에는 별다른 표시가 없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예배 참석을 위해 모인 유대인들이 한가득이었다.
대충 봐도 200명이 넘어 보였는데, 남자들은 키파(Kippah)라고 불리는 작은 천조각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종교 문화겠지만, 남자와 여자를 분리했다. 중간 자리에는 남자만 앉을 수 있었는데, 요나는 그런 문화가 혹시 내게 이상하게 보일까 걱정했는지 ‘21세기에 남녀를 구분한다니. 우습지 않아?’라고 말하고 예배 끝까지 내 옆을 지켰다.
인도의 구석진 동네에 유대교 예배라니. 무엇보다 이 많은 유대인이 예배를 위해 모이다니. 작은 규모였지만 개신교의 목사와 같은 주최자가 있었다. 그의 주도로 예배가 시작되었고, 모두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나만 동양인이고 비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내 행동거지 하나하나 혹시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신경 썼다. 노래는 따라 부를 수 없었지만 고개를 흔들며 박자를 맞추었고, 기도를 할 때는 정성을 다해 손을 모았다.
한 세 곡쯤 흘렀을까. 갑자기 홀로코스트가 떠오르면서 반 세기 전 나치 수용소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유대인뿐만 아니라 당시 억울하게 죽어간 집시, 동성애자, 정치범들 모두 살고자 하자는 간절한 마음으로 신께 이와 같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면서 알게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무엇이 이토록 강렬하게 국토도 없는 이들을 이 천년 간 한데 묶어 놓은 걸까.
종교 때문일까. 종교란 무엇일까.
야파네 가족은 여러 가지 면에서 나와 코드다 맞았다. 터프, 과감, 도전적이랄까. 동네에 큰 축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고민 없이 다 같이 바이크를 빌리기로 했다. 대충 20km 정도 되니까 충분히 운전해 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른 아침 뱃속을 채우고 출발하는데 햇볕이 강렬하다. 또 인도에서는 여러 번 운전해보았지만 모래 때문에 이처럼 미끄러운 적은 없었다. 그리고 난 미얀마에서 동생 두 명을 태우고 운전하다 미끄러진 이후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다.
분명 그런 사전 설명을 단디 해두었지만, 역시나 야파네 가족은 나보다 한 수위다. 심지어 혼나는 자전거만 타봤지 스쿠터는 처음이라고 했는데 한 시간 탄 뒤 내게 ‘자전거랑 똑같은데 빨라서 재밌다’며 날 한참 앞질러갔다. 집안 유전자가 유별난 걸까, 아님 진짜 군대를 다녀온 경험 때문일까.
레까지 왔는데 트레킹을 안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야파와 한나의 나이를 고려해 그나마 가장 쉽다는 샴 트래킹을 하기로 하고 짐을 챙겼다. 샴 트레킹의 별명이 베이비 트래킹일 정도로 코스가 쉽다기에 나는 별다른 준비 없이 등산화만 챙겨갔다. (한국 가이드북에는 트래킹 정보가 없다. 심지어 한국인들은 트래킹을 하지 않는다고 여행사 직원에게 들었다.)
택시기사가 한참 길을 헤매고, 한 두 어 시간 뒤쯤 길 어딘가에 우리를 세웠다. 다행히 첫 번째 날 계획한 코스 초입이었기에 우리는 전열을 가다듬고 본격적인 트래킹에 나섰다. 처음은 순탄했다. 냇가 인근은 수풀이 많고 그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길이라면 5~6시간 우습게 걷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는 돌산 천지의 라다크가 아니더냐.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에 돌산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급속도로 걸음이 뒤쳐졌다. 특히 역시 우려했던 대로 야파와 한나가 많이 힘들어했다. 쉬고 싶어도 그늘이 없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날은 셋 째날이었다. 산 봉우리를 두 개나 넘어야 하는 대다 길이도 20km가 넘었다. 나중에는 발이 무감각해지면서 별다른 의지 없이 자동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띄엄띄엄 이긴 했어도 나름 수영을 계속했건만, 다 소용없다. 늘어난 몸무게가 문제일 수 있겠구나.
아니다. 트래킹 이름을 잘못 지었다. 이게 무슨 베이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