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병에서 벗어난 바로 다음 날, 이틀을 그냥 침대에서 보냈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 조급하게 다음 일정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레는 교통이 그리 잘 발달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보통 팀을 이뤄 지프 한대를 빌려 주변 마을들을 찬찬히 돌아보는 편이다. 그래서 레 시내에는 지프 대여 서비스를 하는 여행사가 즐비하다.
사실 난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여행사가 어딘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국적의 여행자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인근에 좀 인기 있어 보이는 여행사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누군가 처음 들어보는 억양의 영어로 말을 걸었다.
“누브라밸리와 판공초 묶어서 3박 4일 지프 투어 할 건데, 이제 딱 한자리 남았어. 갈래? 팀원은 지금까지 이스라엘 여행자 5명이야.”
개인과 국가를 분리해 생각해야겠지만, 사실 난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스라엘 건국 과정도 그렇고,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을 목격할 때마다 불편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이스라엘 사람들과 3박 4일 생활을 해보겠는가, 그리고 또 내가 언제 이스라엘 사람들과 직접 대면해 홀로코스트나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는가. 망설임 없이 바로 다음날 같이 투어를 떠나기로 했다.
알고 보니 5명은 한 팀이 아니었다. 엄마, 딸, 아들 이렇게 셋이 여행이 온 야파네 가족, 그리고 각자 홀로 여행 왔다가 만난 한나와 요나로 나뉘었다. 야파네 가족이 인도로 여름휴가를 온 것은 아들 우디 때문이다. 보통 이스라엘에서는 남녀 불문하고 제대를 하고 나면 장기 여행을 떠나는데, 우디가 제대 후 네팔과 인도로 떠나자 기꺼이 누나와 엄마가 인도로 온 것이다.
야파네 가족상은 여러 가지로 내게 충격이었다. 서로 친구 사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서로 대등했다. 담배를 말아 같이 돌려 피는 것도 그렇고, 이혼한 엄마가 자신의 남자 친구 이야기를 마치 친구한테 말하듯 아들 딸에게 서슴없이 나누었다. ‘나도 자식을 낳으면 저렇게 좋은 친구가 생기는 건가’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나는 무려 손자를 셋이나 두었지만, 마음만큼은 여전히 소녀다. 한나와 사흘 내내 계속 방을 같이 썼는데, 이른 아침 갑자기 훌쩍거리는 소리에 깨서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한나가 머리를 감다 말고 울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만 뜨거운 물을 찬물과 섞어 머리를 감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면서 돌아가신 엄마가 그리워져 눈물이 났다고 했다. 30년 넘게 아들 셋을 다 키우고, 이제는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살겠다며 대학도 들어가고 여행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이러한 용기가 우리나라에서도 흔해졌으면 생각이 든다.
요나는 정말이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위인이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한참 어린아이로 봤던 요나는 나를 어린아이 챙기듯 챙겨줬는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다. 나랑 열 살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나지만 이미 성인이 된 자녀가 있다는 사실에 놀랬는데 그가 더욱 놀라운 것은 장차 스님이 되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아이들이 군대를 가고 출가를 하면 동양의 어느 나라에 정착해 스님이 되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했다.
머리를 기르는 이유도 평생 머리를 밀고 살아야 하는 스님의 숙명을 후회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란다. 동양인인 나보다 중동권 이스라엘 사람이 우리나라 유명 스님들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다니. 도대체 무엇이 그를 스님의 길로 이끌고 있을까.
누브라밸리 투어의 핵심은 바로 투르툭(Turtuk)이다
오프로드 길을 8시간 가까이 가야 하는 곳이지만 무조건 가보리라 마음먹은 이유는 모슬렘이 사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1971년 파키스탄과 인도 간의 땅따먹기 싸움에서 인도가 승리하고 국토가 파키스탄에서 인도로 바뀌었는데 여전히 마을 사람들은 40년 전 그대로 이슬람교를 이어오고 있다고 하니 듣기만 해도 매력적이지 않은가.
또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지 7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니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투르툭까지 가는 길은 험했다. 여전히 파키스판과 중국 정부와 마찰 빚고 있어 외부인의 출입이 부분 허용되기 때문에 불시 검문을 위한 여권은 반드시 챙겨야 하고, 또한 무려 숙박비에 달하는 퍼밋을 받아야 진입이 가능하다.
투르툭을 도착하고 우리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산간 층층이 자리 잡은 보리밭이었다. 풀 하나 없는 잿빛 산등성이에 무슨 짓을 했기에 보리를 저렇게 훌륭하게 키워낸 것 일까. 마침 방문한 시점이 탈곡 무렵이었는지 남녀노소 구분 없이 보리 낱알을 분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또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마을 구석구석을 연결하고 있는 수로다.
산 꼭대기의 눈과 얼음이 녹은 물을
수로로 이어 생활 용수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걸 몰랐던 난 숙소에 도착하고 행복한 나머지 집 앞에 있는 냇가에 욘니와 발을 담그고 놀고 있었는데 아주머니가 ‘그거 먹는 물이에요’라고 말하고 나서 재빨리 발을 빼었다.
구불구불 수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길을 잃었다. 마을이 바라나시만큼이나 복잡해 길을 잃기 십상이고 들었는데 역시나 예외는 없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라고 천천히 둘러볼 요량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발걸음 가는 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눈에 띄는 건 바닥을 주황빛으로 수놓는 살구나무였다. 라다크를 대표하는 과일 나무라면 아마 누구라도 살구나무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은데 살구나무가 가정, 냇가, 공터 관계없이 지천으로 나있어 손만 뻗으면 어디서든 살구를 먹을 수 있다. 그 양이 당장 먹기엔 너무 많아서일까. 야크 털 위에 살구를 말린다거나 통에 담아놓고 잼으로 만드는 가정도 많다. 나도 불그스름 익은 녀석들을 손에 쥐고 솔래솔래 동네를 누볐다.
라다크에는 정말 버릴 것 하나 없다
염소나 쪼(야크와 암소의 교배종)의 접근을 막는 울타리 위에 가축 배설물들을 햇볕에 말린다. 심지어 외양간이나 우리뿐만 아니라 방목지의 초원에서도 주워 모아 겨울용 땔감으로 쓴다고 하니, 라다크 사람들이 이토록 까다로운 환경 속에서 어떻게 오랜 세월 살아왔는지 감히 짐작이 된다.
더욱이 ‘오래된 미래’ 책에 따르면 설거지하고 남은 물도 그냥 버리지 않는다고 한다. 설거지 물에 있는 아주 작은 음식물이 동물들에게 조금의 영양분을 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자본주의가 밀려들어오기 전까지 소금과 차, 몇 가지 공구만 외부에서 들여왔다.
천 년의 세월을 넘게 거의 완벽히 자립을 해온 라다크.
어쩌면 우리가 그리던 미래가 여기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