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잃으면 마음을 잃는 것
저녁을 빼앗기면 몸까지 빼앗긴 것
이문재 시인의 ‘저녁 산책’의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한 때이긴 했지만 바쁘게 사는 것이 청춘을 올바르게 소비하는 것이라 착각한 적이 있다. 물론 자의보다는 타의가 컸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기의 마음과 몸은 온전히 타의의 것이었다.
여유를 회복하고 부터는, 그때 미처 찍지 못한 쉼표를 찍고 있다. 당시 난 무엇을 목표로 했었고, 무엇이 부족했었으며, 무엇이 결국 날 지치게 했는지 등 등. 그렇다고 명확한 답이 내려진 것은 아니다. 그래도 지금이나마 그 때의 개별 경험들에 대한 내 감정을 뭉개지 않고 분명하게 서술할 수 있게 되었다.
내게 있어 여행은 산책과도 같다. 머리를 비우고 바람을 쐬듯 잠시나마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 지나온 자취를 돌아보는 것. 더욱이 내 여행의 기점이 대부분 무언가의 끝과 시작 사이에 위치했기에 여행이 끝나고 나면 늘 백지 상태가 되는 것도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든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이 주는 자극은 분명히 내 삶의 작법에 영향을 줄 것이라 믿기에,
내 새로운 백지가 이전 과는 다르게 쓰여질 것을 믿기에,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짐을 쌌다.
이번 여행지로 라다크를 선택한 이유는 대단치 않았다. 내가 인도 여행 중에 만난 여행자 대부분이 라다크를 인도 최고의 여행지로 꼽았고, 그때부터 라다크는 언젠가 가야 하는 숙제 같은 곳이었다.
1년에 딱 석 달간만 육로 이동이 가능한 땅
춥고 척박하고 건조한 땅
리틀 티베트라 불리는 땅
궁금하지 않은가.
솔직히 위험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여행철수권고 지역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치면 여행자 보험 적용조차 안 된다. 거칠게 나눠 라다크 좌측에는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을 원하는 민족이, 우측에는 티베트인들이 거주하기 때문에 인도는 파키스탄과 중국 양 국가와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다른 의미로 라타크는 인도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그럼에도 여름이면 수 많은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사람 때문이다. 인크레더블 인디아를 단 한번이라도 다녀간 여행자라면 공감하겠지만 듣도 보도 못한 사기술로 사람의 진을 빼놓는 인도인이 여기에는 없다. 정말 없다. 심지어 식비, 숙박비가 후불제다.
고생스럽게 이곳 저곳을 돌며 비용을 견줄 필요도 없다. 바가지가 상식 수준이기 때문에 차라리 그 시간을 유희하는 게 남을 정도.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땅에서 도대체 어떻게
서로간의 신뢰를 쌓을 수 있었을까
사실 지금과 같은 국가간의 마찰이 있기 전에는 다수의 불교도들과 소수의 이슬람교도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600년이 넘도록 두 집단은 농번기면 서로를 돕고, 상대 종교 축제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종교의 제약을 넘어 혼인까지 했다고 하니 믿어지는가.
헬리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에서 한 라다크 출생 불교 철학가가 쓴 노래로 라다크 사람들 삶에 대한 답을 대신해 본다.
“당신이 태어난 위대한 유럽에는 자유의 나라들이 번성하고 있지요. 물질의 풍요와 산업과 기술 모두를 가지고 있지요. 그곳은 세속의 기쁨이 더 크고 분주한 생활도 더 많겠지요. 과학도 문학도 그리고 모든 일들이 더 많이 변하고 있지요. 이곳에 사는 우리에게 진보는 없어도 우리에겐 기쁘고 평온한 마음이 있어요. (…) 우리가 하는 좋은 일과 나쁜 일 때문에 기쁨과 슬픔이 생기는 거에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 한다면 이중의 망상이 남을 것이고 이해가 말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말들만이 끊임없이 이어질 거예요.”
새벽 1시, 델리 공항을 도착하고 공항 노숙을 하며 본격적으로 가이드북을 들여다보았다. 일단 목적지는 라다크의 수도 레! 가는 방법을 두 가지였다. 35시간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과 1시간 30분 비행기를 타고 가는 방법. 뭐, 버스도 그다지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천천히 올라가면서 고지대에 적응도 하고, 올라 가면서 만난 사람들한테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난 무모한 선택에 끌리고 만다. 일단 와이파이를 확보하겠다는 생각으로 지나가던 인도 아저씨를 잡아 세웠다.
“아저씨, 저 와이파이 써야 하는데 인도 번호 없어요. 번호 좀 주세요.”
내 상큼한 미소가 먹힌 걸까. 손쉽게 아저씨의 번호를 따냈다. 허락된 시간은 45분. 촉박하다. 그렇지만 이를 대비해 틈만 나면 항공권을 검색했던 내가 아니던가. 단숨에 Goair 인도 국내선을 찾아내고, 새벽 5시 출발 비행기 12만 원 결제 완료. 이제 남은 시간은 2시간뿐. ‘이런 쫄깃한 맛에 여행을 하지’라는 중2병 환자 같은 생각을 하며 국내선 터미널로 뛰었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착륙 20분 전에 사진 셔터 소리에 눈을 떴다. 외국인 내국인 너나 할 것 없이 창 밖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렴풋이 델리-레 비행기 밖 풍경이 장관이란 얘기를 들었던 게 기억나 자리를 옮겨 나도 창가 쪽으로 붙었다. 그리고 창 가림막을 열면서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안경을 찾는데 그냥 그 자세 그대로 멈춰 버렸다.
눈이 채 녹지 않은 산봉우리들이 창공을 향해 솟아 있는데 한 두 개, 아니 대여섯 개 수준이 아니다. 산봉우리 바다라고 하면 제대로 표현되려나. 끝없이 산과 산이 일렁이듯 이어지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 지구과학시간에 배웠지. 이건 무언가가 어떤 힘으로 분명 육지를 구겨버린 것이다.
누군가 옷감을 쥐었다 핀 듯
꼬깃꼬깃 봉우리 하나하나가 뾰족히 서있었다
본격적으로 하강하면서 그 거대한 몸채는 더욱 날 압도하였다.
‘물줄기의 흔적은 보이는데 왜 풀 하나 없을까. 못 심은 건가 안 심은 건가. 골짜기 사이 저 마을에는 정령 사람이 산단 말인가. 무엇을 먹고 살까. 도대체 왜 여기서 왜 살까…’
착륙하고도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풍광에 취하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아니, 이렇게 서막이 화려하면 본극은 어떻단 말이냐.
역시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하늘에서의 첫인상이 강렬했던 만큼 고산병 또한 강렬했다. 단숨에 3,500m를 올라왔으니 말이다. 숙소에 도착하고 아침을 먹은 동시에 고산병이 시작됐다. 손끝 발끝이 저리고, 머리가 아프고, 미열이 나면서 메스꺼웠다. 망했다.
네팔에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같이 했던 기영이과 강한이가 보고 싶어졌다. 날 밀어주고 끌어주느라 고생 많이 했는데… 여기엔 그 동생들도 없으니 정말 큰 일이다. 산이 나를 허락할 때까지 홀로 감내해야만 한다. 어차피 약은 소용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물 2리터를 챙겨놓고 누웠다. 그리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잠시 네팔에서 경험한 고산병을 얘기해보자. 그때 나는 헛것을 보았다. “아까 내려오던 그 핑크색 옷 입은 여자 어디 갔어?” 좋지 않은 컨디션으로 힘겹게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는데 내 눈에만 어떤 백인 여자가 보였고 그 순간 헛소리를 지꺼린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날 우리는 산행을 멈췄다. 나 때문에. 아마 뇌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서일 거라고 과학적이고 의학적으로 날 진단해주려고 했지만 난 안다. 그대들이 꽤나 섬뜩해 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날 밤 난 수십 개의 꿈을 꾸고 하루 반나절 뒤 살아났다.
이번 고산병은 그 때보다 더 악랄했다. 극복하는데 무려 50시간이 걸렸다. 그냥 버스 타고 솔랑솔랑 올걸 잠깐 후회가 됐지만, 뭐 이미 벌어진 일. 그리고 난 단돈 12만 원으로 전지적 신관점으로 라다크를 보지 않았던가. 됐다. 세상은 어차피 기브 앤 테이크. 나란 녀석은 역시 멍청해서 이번에도 몸으로 배웠다. 고산병은 걸려도 또 걸리며,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5시간 뒤 드디어 본격적인 여행길에 오른다.
이제부터는 몸으로 배우는 일은 더 이상 없길 바라며.
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