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와 커피가 함께 있는 카페 '론드리 프로젝트'
에디터. 장경림 사진. 김현경 자료. 로그램
가파른 해방촌 골목길. ‘론드리 프로젝트’는 새하얀 이불처럼 뽀얀 자태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탁과 카페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갖춘 이곳은 누군가에겐 나만의 세탁방이, 누군가에겐 멋진 작업실로 밀레니얼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때 해방촌은 이국적인 상점 몇 개가 동네 초입에 자리 잡은 것이 전부였지만, 최근 몇 년간 예술가들의 개성이 더해져 특색 있는 동네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2015년, 해방촌 윗자락에 문을 연 론드리 프로젝트는 카페에 세탁방을 겸한 당시 생소한 모습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유난히 햇살이 밝았던 어느 오후, 론드리 프로젝트를 운영 중인 이현덕 로그램 대표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푸른색 앞치마를 입고 커피를 내리는 그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동네 단골 카페에 놀러 온 듯 마음이 한껏 여유로워졌다.
촘촘히 흘러가는 하루 일과 속 빨래는 언제나 작은 일거리에 불과했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1시간 남짓은 마냥 기다릴 수는 없으나,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애매한 시간으로 여겨지기 쉽다. 겨우 기다린 이불 빨래를 널자니 작은 집은 더욱 비좁게 느껴진다. 이현덕 대표는 친구가 작은 집 생활에서 겪게 되는 불편함을 우연한 기회에 포착하게 되었다.
“해방촌의 분위기를 평소에 좋아했는데, 마침 이 동네의 셰어하우스로 이사 온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말하길 셰어하우스가 재미있고 참 좋지만, 이불 빨래를 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외국인도 많이 살고 빨래방이 있을 법했는데, 있던 것은 이미 다 빠져나가고 없더라고요. 빨래방이 생기면 분명 수요가 있겠다 싶었죠. 그런데 아직까지 생기지 않은 이유 역시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찰나에 파리에서 교환 학생을 하며 느꼈던 빨래방의 분위기가 떠올랐어요. 햇빛도 잘들고, 외국 친구도 멋지게 앉아 있고, 세탁기 안에 옷들이 달그락달그락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죠. 뽀송한 세제 냄새도 풍기고요. 타지에서 외로웠는데 그곳에선 뭔가 편안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분위기가 좋으니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좋았죠.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탁과 낭만. 나란히 놓기에 꽤나 어색했던 두 단어는 론드리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함께 쓰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작은 집의 불편함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커피 한 잔으로 여유도 누릴 수 있다. 원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자고 일어난 곳에서 밥을 먹고, 빨래를 널고, 그 옆에서 일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곳은 근사한 사무실 역할도 한다. 동네 주민들이 사용하니 자연스레 커뮤니티가 생겨났고, 24시간 코인 세탁방이 주지 못한 연대와 포근한 정서가 만들어졌다. 론드리 프로젝트는 그렇게 해방촌 젊은이들의 새로운 문화 공간이 되었다.
“세탁이라는 콘텐츠를 통해 도시의 빈 공간을 채우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도 채우고자 해요.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여유를 느끼고, 즐거운 만남을 가지기도 하죠. 사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오래 사신 주민분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젊은 친구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죠. 궁금해서 말을 걸곤 했는데, 음악하는 친구도 있고 디자인하는 친구도 있고 참 다양했습니다. 저도 건축을 전공했던 터라 말도 통하고 재미있었죠. 세탁기를 돌리며 자신의 작업도 하고,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 이 공간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어요.”
다양한 만남이 공존하는 론드리 프로젝트는 해방촌의 자유로운 동네 정서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한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2호점 ‘워시 타운’은 홍대 인근에 위치한 만큼 또 다른 사람들이 모여든다. 두 지역은 언뜻 보기에 밀레니얼 세대의 활동 지역이라는 비슷한 인상을 풍긴다. 하지만 해방촌과 홍대는 같은 서울 내에서도 확연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각기 다른 동네에서 세탁 카페를 운영하는 이현덕 대표는 두 동네의 이용자 성향이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해방촌은 미군 부대가 있어 이국적인 서양 문화가 남아 있어요. 그래서 외국인들이 많이 올거라 예상도 했죠. 초창기에는 카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특이하고 이색적인 공간이라고 소개하며 론드리 프로젝트가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입소문을 타다가, 동네 사람들이 호기심에 세탁기를 이용해보니 편해서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세탁기를 안 사도 되겠다고. (웃음) 한 명, 두 명씩 이 공간을 꾸준히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외국인들도 찾아오게 됐죠. 이제는 단골 고객이 많아요. 여기 사는 할머니들도 가끔 오세요. 초등학교 동창회처럼 이곳에 모이시곤 해요.”
해방촌은 미군 부대 인근에 위치, 남산 밑의 경사 지형이 그대로 드러난 동네다. 이런 여건으로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옛집이 그대로 남아있어 오랜 시간 사는 주민도 많다.
“생각해보면 해방촌은 지금까지 서울 내에서도 섬 같은 곳이었어요. 다른 동네는 재개발도 이뤄지고, 이사도 빈번한데 이곳은 개발되지 않아 평생을 이곳에서만 사신 분들이 많아요. 할머니들도 떠나지 않고 쭉 사신 거죠. 외국인과의 접촉도 많아서 무서워하지도 않으시고, 콩글리시로 대화를 하세요. 그런 모습들이 이곳에 있으면 참 재미있고, 개발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참 글로벌한 동네구나 생각하게 돼요.”
론드리 프로젝트에서는 캐주얼 복장으로 카페 일을 해도 어쩐지 자연스러운 분위기라고 말한다. 반면 홍대의 워시 타운은 외출복으로 갖춰 입은 사람들도 많이 방문하고, 서양 문화보다는 일본 문화가 동네에 자리 잡고 있다고 전했다.
“홍대에 있다 보면 일본 잡지에서 볼법한 패션 스타일을 자주 보게 됩니다. 상권도 일본 식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워시 타운 주변에는 일본 사람들이 자주 가는 게스트 하우스도 여러 곳 있고요. 그곳에 있으면 해방촌보다 멋지게 입고 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웃음) 두 곳을 운영하며 같은 서울이지만 동네마다 다른 문화를 띄고 있다고 느껴졌죠.”
두 지역을 선택한 배경에는 동네를 바라보는 이현덕 대표의 안목이 담겨 있다. 온전히 1인 가구를 대상으로 한 세탁 카페 사업을 준비했다면 대학가나 고시원 밀집 지역을 알아봤을 터. 그는 세탁과 카페를 겸한 공간을 통해 밀레니얼 세대에게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고자 했다.
“1호점을 열 당시엔 해방촌은 세탁방이 필요해 보였고, 재미있는 커뮤니티가 생겨날 것이라 예상했어요. 그러다 2호점을 준비하게 됐고, 이때는 제가 하는 일을 통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확장하고자 생각했죠. 새로운 것을 낯설어 하지 않고, 좋아해 줄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다가 트렌드를 앞서가는 지역을 찾아보게 됐어요. 홍대라면 적합하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직접 들어가 보니 해방촌과는 또 다른 카테고리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기회가 됐어요.”
작은 집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1인가구의 어려움을 달래주는 산업 역시 주목받고 있다. 론드리 프로젝트의 등장도 이런 현상의 일환이 아닐까. 빨래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일도 하지만, 이곳에서 만나는 동네 사람들 덕분에 혼자 사는 외로움을 달래기도 한다. 동네의 사랑방이 되고 있는 이곳은 혼자 사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공간이다.
“저는 편의점이 늘어나는 현상을 보며 1인 가구의 냉장고가 집 밖으로 나갔다고 바라봤어요. 항상 신선한 음식을 먹고 싶은데 집에 큰 냉장고를 둘 수는 없고, 음식을 버릴 바에 돈을 더 주더라도 신선한 것을 먹겠다는 생각으로 이해했죠. 론드리 프로젝트와 워시 타운도 따지고 보면 집 안의 세탁실이 나온 건데, 운영하다 보니 세탁실보다 더 정확하게 공간의 개념을 생각해봤어요. 여기를 굳이 왜 올까? 그저 세탁기만 필요했다면 코인 세탁방에 가도 상관이 없겠죠? 이곳은 작은 집에서 누릴 수 없는 것들이 바깥에서 해결되고, 동시에 집과 같은 편안함도 있다고 생각해요. 세탁실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빨래를 기다리면서 차 한 잔을 마시는 거실도 되고요. 작은 집에선 거실을 가지기 힘드니까요. 이곳에서 사람들도 만나게 되죠. 빨래는 하나의 핑계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슬리퍼를 끌고 바깥으로 나온 해방촌 주민들은 론드리 프로젝트로 삼삼오오 모인다. 편안한 차림에도 어쩐지 내 집처럼 어색하지가 않다. 이현덕 대표는 이런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역할이 중요함을 마지막으로 강조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따라하기 쉬운 사업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걱정을 했죠. 하지만 핵심은 사람임을 알게 됐어요. 하드웨어는 따라 할 수 있지만, 사람으로 만들어진 무형의 것은 만들 수 없거든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커뮤니티나 관계는 돈을 주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손님들과 이야기도 자주 나누고,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학교 다닐 때 프로젝트 과제를 하며 동네 리서치를 하곤 했어요. 한 동네를 정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 학기 동안 고민하는데, 그 리서치가 정말 재밌었죠. 하지만 당시에 커뮤니티 공간을 기획하는 것은 이론일 뿐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탁 카페를 직접 열어보니 사람들이 욕구에 맞게 이 공간을 이용하고, 커뮤니티가 자연스럽게 생겼어요. 그때의 배움이 통했구나, 이제 와서 새삼 깨달았죠. ”
먹고 사는 일에 집중을 하다 보면 빨래란 대수롭지 않은 행위로 생각되기 마련. 무의미하게 흐르던 세탁기 돌리는 시간이 향긋한 커피를 즐기는 순간으로 재해석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과 공간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브리크 brique> 웹 페이지에서 보기 : http://bitly.kr/Ip0v5CZFFz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