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으로 가는 발걸음, 구보건축사사무소
에디터. 김윤선 사진. 최진보 자료. 구보건축사사무소
서울 만리동, 어디선가 소설가 구보 씨가 나타날 것만 같은 옛 서울의 정취가 느껴지는 동네에서 묵묵히 미래를 지어나가는 이들이 있다. 과거로부터 온 헝클어진 질서를 매만져 구조와 관계를 바로 세우고, 현재의 일상에서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을 건축가의 사명이라 여긴다는 사람들. 한 발 한 발 자신이 가야 할 길로 묵묵히 걷고 있는, 구보건축이다.
‘구보건축’이라는 이름에서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생각났어요. 진짜 거기에서 착안한 이름이라고요.
조윤희 보통 반응이 두 가지예요. 하나는 소설 제목, 또 하나는 빠르게 걷는다는 의미의 구보驅步.
홍지학 이름 짓기의 단 한 가지 원칙은 ‘간단한 말’이었어요. 읽기 쉽게, 영문으로는 하지 말자 했죠. 좀 촌스럽고, 옛날 사무실 같은 이름으로 했어요. 그런 이름으로 세련된 설계를 하면 그게 진짜 멋진 거라고. (웃음) 무엇보다 구보의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어요. 소설은 평범한 지식인인 구보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경험하는 일상적인 이야기잖아요. 그런 평범한 시각으로 건축과 도시를 보며 아름다움과 의미를 발견하는 일을 하려 합니다.
그러한 지향점을 가지게 된 계기나 배경이 있었나요?
조윤희 미국에 있을 때, 미래 지향의 테크놀로지적 건축을 주로 하는 화려하고 세련된 감각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했어요. 그런 곳에서 실무를 하다 보니 문득 제 일상과 좀 거리가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이런 활동이 어떤 사회적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 의문이 들었죠. 내가 사는 집과 주변 환경의 퀄리티, 그리고 일로써 해야 하는 하이엔드 건축과 문화 사이에 괴리감이 있었어요. 건축가로서, 삶을 영위하는 개인으로서, 내 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근무 환경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죠. 아이폰도 시리즈가 계속 나오잖아요. 이미 충분히 좋은데 계속해서 새로운 게 나오니 또 구입하고. 기술의 진보와 속도가 우리의 필요를 넘어섰다고 할 수밖에요. 저는 그런 데서도 일종의 염증을 느껴요. (웃음)
홍지학 과한 제스처, 과한 노동력이 드는 일을 지양해요. 예를 들어 건물 외관에 선홈통(지붕의 빗물을 배수하기 위해 연직 방향으로 설치하는 홈통)이 보기 싫어서 그걸 가리기 위한 디테일을 만들 수도 있는데 나중에 문제가 있을 땐 다 뜯어내야 해요. 어찌 보면 그런 게 욕심인 것 같아요.
조윤희 물론 무심한 디자인을 좋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선홈통도 아무렇게나 있으면 안 되고, 건물에 맞게 자연스럽게 디자인해야죠. 심미적인 즐거움 역시 저희 작업의 기본 속성이니 간과할 수 없어요. 다만 합리적으로 적정선을 찾으려 해요.
한국으로 돌아와 2015년에 개소하셨죠. 몇 년간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을 텐데요. 우리나라의 문화적 토대나 가치관, 건축 시스템을 미국과 비교해 이야기해주신다면.
조윤희 얼마 전 현장에 갔는데 건축주와 시공사 사이에 돈 문제로 실랑이가 있었어요. 건축주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시공사는 돈이 너무 부족하다고 신경전을 벌이는 가운데 다른 현장에서 민원 문제로 전화가 왔어요. 총체적 난국이었죠. (웃음) 복잡하고 지친 마음으로 회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돈을 조율하고, 사람 사이를 조율하고, 관계를 조율해 건물이 하나 들어서는 이 고된 모든 일이 결국 헝클어졌던 질서를매만지는 일이구나.’ 그동안 일을 하면서 왜곡된 것들을 많이 봐왔어요. 일하는 방식이나 규정을 대하는 태도 등 상식적이지 않은 것투성이였죠. 미국에서 일했던 방식대로 하려니일의 시작부터 너무 껄끄러웠어요. 아주 작은일부터 제대로 하고 싶어 하니 그동안 대충해온데서 마찰이 생기고, 어디를 가나 싸울 수밖에 없어요.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하면서 건물을 뜯어내고 다시 설계하고 온갖 조율을 거쳐 멀쩡한 상황으로 원상 복귀하는 지난한 과정이 마치 엉망진창이었던 사회 구조나 관계를 바로 세우는 일과 같다고 느꼈습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만들어진 건물,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가 다시 제소리를 내며 마찰음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마찰은 도리어 자연스러운 일이라 여겨졌어요. 정신 승리일까요? (웃음)
그간 진행해온 프로젝트를 보면, 공공 건축과 연구 활동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공 건축과 민간 건축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홍지학 우리나라 공공 건축은 지어지는 과정에서 건축주의 역할을 하는 주체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건물을 관리할 사람만 남아 있죠. 그러니 건물에 대한 ‘꿈’이 없달까. 단지 문제없이 순서대로 진행해 정해진 예산을 다 쓰면 돼요. 새로운 도전과 시도보다는 이미 사례를 통해 검증된 안정적인 것만 추구하니 발전이 없어요. 욕심 없이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이보다 더 좋은 프로세스가 어디 있나 싶기도 해요. 돈도 잘 주지, 디자인도 애쓸 것 없지, 그저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되니까. (웃음)
조윤희 그렇지만 한계가 많아서 같은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고 일정 수준 이상 나아가기 힘든 것 같아요. 계속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아요.
홍지학 반면 이 시대 욕망의 최전선을 느낄 수 있는 게 민간 건축이에요. 사람들이 어떤 것을 갖고 싶어 하고 무엇을 좋다고 생각하는지 속속들이 알 수 있어요. 충분히 즐길 수 있고, 새로운 걸 시도해볼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윤희 디자인은 시류를 이해하는 일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시장에 빨리 반응하는 감각을 잃지 않아야 해요. 민간 건축은 이런 감각이 더 많이 필요하고 새로운 시도나 실험에 대한 반응이 유연하기에 좀 더 높은 퀄리티를 추구할 수 있죠. 민간에서 습득한 감각과 지식을 공공에 적용해 더 많은 사람이 좋은 공간을 누릴 수 있도록 공공 건축의 퀄리티를 높이고 서로 순작용을 하도록 양쪽을 다 다룰 수 있으면 좋겠어요.
청운광산은 그사이에 끼어있는 민관 협력 사회주택 프로젝트죠. 어떠셨나요?
조윤희 사회주택의 정의는 아직 좀 모호해요. 임대주택도 공유 주택도 아닌, 공동체 주택이라는 표현도 심심치 않게 들었죠. 법적 정의와 행정적 정의가 다르기도 하고요. 적절한 임대료로 시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사회적 경제주체가 공급하고 운영하는 주택을 사회주택이라고 볼 수 있어요. 많은 주체가 모여있지만, 전례가 없어 시행착오도 많았어요. 건축주이자 기획과 운영을 맡은 서울소셜스탠다드가 공유 주택 운영 경험이 많아 방향이 명확하고 노하우가 있어 확실히 이점이 있었어요. 자본에서 공공의 힘을 빌리되, 민간의 손과 발로 추진하는 만큼 퀄리티 좋은 집을 만들어보자며 의기투합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공공 건축 프로젝트를 소개해주시겠어요?
홍지학 신명중학교 체육관 프로젝트요. 전형적인 체육관과 다르게 설계했거든요. 보통 우리나라 학교에서 체육관은 교사동과 별동으로 떨어져 있어요. 옛날에 급격한 인구 증가로 학교가 부족해지자 표준설계도를 도입해 학교를 싸게 많이, 마구 지은 시절이 있었어요. 획일적이고 시대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는 설계가 지금껏 이어져 왔으니 학교가 ‘감옥’ 같다는 말이 나오죠. 여기에선 기존 교사동과 체육관을 아예 붙였어요. 학교 안에 아이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별로 없으니 체육관이 그런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요. 교실과 체육관이 가까이 붙어있어서 쉬는 시간에 체육관을 내려다볼 수도 있고, 언제든 와서 놀고 서로 만날 수 있는 마당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조윤희 그런데 난관에 부딪혔어요. 중학교 남자아이들은 예측불허의 존재라 학교 관계자들이 안전에 대해 특히 민감했기 때문이에요. 체육관으로 뭘 던지거나 뛰어내려서 안전사고가 발생한대요. 결국, 초기 아이디어와는 달리 체육관과 교실 사이에 창문과 벽이 생겼어요. 시도의 흔적은 남아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웃음)
홍지학 왜 저런 계획안을 뽑았느냐며 구박도 많이 들었어요. 체육 시간에만 쓰고 평소엔 문을 잠가 놓는 전형적인 형태의 체육관만 봐왔으니,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육 공간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새로운 시도가 너무 간절했는데, 저희 생각과 그들의 생각이 충돌되니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더라고요. 말도 없이 다 바꿔버리고. 이전 것을 답습하면서 그대로 간다면 만드는 사람들은 편하겠지만, 가장 불편한 사람은 실제 그 공간을 쓰는 학생, 더 나아가 시민들이에요.
조윤희 새로운 시도의 장점이 90이고, 단점이 10이라면 90을 보고 일을 추진할 수도 있는데, 단점 10이 없어야만 진행이 되더라고요. 공공 건축의 한계와 시스템의 문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많은 시행착오와 아쉬움이 섞여 있는 아픈 손가락 같은 프로젝트예요.
최근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어요. 그만큼 집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데요. 집이 누군가에겐 안식처이지만 누군가에겐 벗어나고 싶은 열악한 곳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와 관련해 사회적인 차원에서 분명 건축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조윤희 더 많은 이들이 좋은 공간을 경험해볼 수 있도록 애쓰는 것이 건축가의 소명인 것 같아요. 그동안 우리는 부동산 시장이나 자본 논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집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게 좋은 거라고 인식해왔는데, 그게 정말 좋은 걸까 고민할 기회가 없었죠. 실제 좋은 경험은 어쩌면 돈과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려면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많아져야 해요. 청운광산에서 좋았던 것 중 하나가 앞으로 이 집에 많은 사람이 들고난다는 점이었어요. 조금은 새로운 시도가 있었던 이 집을 많은 사람이 경험하고, 반응하고, 집과 공간이 삶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이고 역할일 겁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좋은 공간, 좋은 집이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세요?
홍지학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청운광산에서 목구조를 적용한 이유에 대한 설명도 될 것 같은데요. 미국에 있을 때 작은 목조 주택에 살았어요. 겨울엔 눈 치우느라 고생하고, 여름엔 어찌나 덥던지. 계절이 온몸으로 다 느껴지는 집이라 너무 힘들었는데, 한국에 돌아와 아파트에 사니 그때가 그립더라고요. 우리가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모든 관리가 ‘외주’라는 점인 것 같아요. 내가 손대지 않아도 항상 쾌적한 공간이 유지되니 좋죠. 그런데 막상 제가 주택과 아파트 둘 다 경험해보니, 좋은 집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집이더군요. 눈도 치우고, 비도 좀 맞고, 여름에는 어떻게 하면 시원해질까 궁리도 하고요. 건물이 계절에 따라 수축, 이완하면서 삐걱거리는 걸 느끼기도 하면서요. 그렇게 외부 환경의 변화를 인지할 때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나라 대부분의 집은 외부와 너무 단절되어 있어요. 사계절 내내 똑같아요.
조윤희 무중력 공간의 우주선 같은? (웃음)
홍지학 약간의 불편함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몸을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 전화 한 통이면 누가 다 해결해주고 그런 게 아니라 직접 몸을 부딪치고 노동력을 들여서 환경을 가꿔 나가는 경험이 필요해요. 사는 게 너무 편하면, 거기에서 희생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이를테면 스스로 일궈내는 삶의 에너지 같은 것들이죠. 나중에 우리 집을 짓게 되면 그런 집을 만들고 싶어요. 계절의 변화를 잘 느낄 수 있는, ‘손이 많이 가는 집’이요. (웃음)
오전 8시 만리동2가에서
아침 일찍 일어난 구보는 오늘의 미세먼지 지수를 확인했다. 어제보다 나은 편이지만 서울의 공기는 여전히 흐리다. 아이의 등원을 마치고 유난히 분주한 출근길에 구보는 다짐한다. 오늘은 구청 공무원과 긴 협의에 담판을 내겠노라고.
오전 11시 30분 사무소에서
오전 회의가 끝나고 커피를 마시던 중 구보는 문득 며칠 전 건축주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들이 모두 행복한지 알 수는 없지만, 같은 목적지가 있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오후 2시 20분 서계동에서
급작스레 공사가 중단됐다. 현장에 방문한 구보에게 소장은 한참이나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구보는 생각한다. 건축가로서 그가 할 일은 이 엉클어진 실타래를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일이라고.
오후 5시 50분 서울로7017에서
서울역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로는 구보가 좋아하는 산책길이다. 남대문까지 들렀다 사무소로 돌아오는 구보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구보는 다시 다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집을 지어야겠다고.
<브리크 brique> 웹 페이지에서 더 자세히 보기 : http://bitly.kr/VTiAYrx7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