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큰병원에선 다 고쳐줄꺼야.
우리 가족에게 서울이란 뭘까?
시한부에 들어선 아빠는 서울의 큰병원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나에게, 삼촌께 부탁하셨다. 이름있는 서울 빅5병원에 전화해보았다. 아빠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다양한 이유였지만, 제일 큰 이유는 가망이없는환자 였을 것이다. 촌각을 다투는 병원 시스템상 확률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에게 포커스를 두는 편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허나 내가 아빠에게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너무 잔인하고, 당신의 죽음을 정당화시키는 일 처럼 느껴졌다. 아빠가 스스로 죽음에 조금씩 다가가는 과정을 느끼게 하는 방법말고 뭐가 있을까.
속절없이 시간을 흐르고 있었다. 나는 결국 서울에 있는 병원에 예약을 해놨다고 거동이 나아지면 갈 수 있으니 잘 드시고 푹 쉬시라고 말씀드렸다.
그 일이 작년의 이맘쯤이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은 말없이 흔들어대기만 하던 그 대낮.
5월. 가정의달.. 신록의계절,, 5월의신부..
마치 5월엔 슬픔이 없는 것 처럼 날씨도 늘 화창했다. 바닷가앞에 척을 둔 아빠집의 노을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없었다.
엄마의 무릎종양은 부산에선 잘 모르는 병이었다. 대학때 들어만 봤지 본적이 없다는 정형외과 의사는 진료의뢰서를 써주며 서울로 가보라고 했다.
그 때부터 서울병원투어는 시작되었다.
내 엄마는 서울에서 당당히 치료받고 싶었다. 묘하게 내 눈엔 엄마도 그것을 원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살고자하는 욕망이 눈에 보였다. 그게 나에겐 희망이었을 것이다. 내 엄마를 내가 지켜야지. 내 몸은 바짝긴장되어 늘 시험직전의 자세가 되었다. 커피를 몇잔 마신 사람처럼 떨렸고, 살짝 불안했으며,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처럼.
여러 병원을 다녀왔고 마지막행이 서울대병원이었다. 교수님은 많은 환자를 쳐내기 위해 이쪽저쪽 방을 옮겨다니며 허루투 쓰는 시간 없이 진료를 보셨다. 엄마의 mri 를 잠시 보시곤 암은 아니라고 하셨다. 하지만 뼈가 부러질 수 있으니 수술은 불가피하다고 하셨다. 대기실에 앉아있는 무수한 환자들 중에 그날 우리가 제일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병원앞 창경궁에 가자고 하셨다.그리고 우리는 서울의 세군데 병원 중 한곳을 정해 치료에 집중해야 했다.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하려면 악성은 3개월 양성은2년이 최소 대기시간이라고 했다. 기다리기엔 엄마다리는 불편한 상태였고, 그마저도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양성이 악성이 될때까지 수술을 안해주는 병원 처럼 느껴졌다. 다른 병원과 다르게 서울대 병원은 mri판독료를 받았다. 15만원.. 아 그래서 대단한 병원이구나. 우리는 수십만원의 진료비등등으로 암이 아니란 말을 들었으니 그걸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아빠가 못 푼 한을 위해서라도 서울에서 수술하고 싶어했다. 다 고쳐줄 것 같이 신비의 명약과 명의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실까? 꼭 그렇진 않아도 부산과 비교할 수 없는 의료환경을 나는 봤다. 지난 한달 부산의 모든 대학병원, 서울의 4군데 빅5 병원을 다녀왔고, 티비에 나온 의사들을 내눈으로 봤다. 그리고 한가지 병에 대해 모두 다른 치료법을 내세우셨다. 그리고 환자와 보호자는 선택하면 되는 거였다. 믿고 맡기는 건 없었다. 믿지만 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서울역 주변의 빵 맛집도 몇군데 다녀왔다.
틈을 내서 내 행복을 찾으려 애썼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내겐 아이들이 있으니까. 거기도 소홀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어제와 오늘이 비슷한 하루이길 바랬다.
아빠에게 서울은 무서운 곳일게다. 서울대학교를 어렵게 졸업하셨고, 부잣집 과외를 하며 돈을 모았고 그 돈으로 부산에 작은 집을 구해 결혼을 하셨다. 머리는 명석했고 환경은 열악했다. 부잣집에 태어났더라면 그당시 유학도 갔을테고 여행이 얼마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지도 아셨을까? 여행을 너무 좋아하는 엄마와 연구에만 몰두하셨던 아빠. 두 사람은 잘 살았고 잘 헤어졌다.
서울을 이제 익숙하게 갈 정도가 된 나.
이젠 여유가 생겨서 서울대병원 앞 창경궁을 들러 해설사와 함께 여행자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물론 여행좋아하던 엄마 덕분에 그곳에 들어갔고, 엄마는 인사동을 가고싶다고 해서 함께 점심도 먹고, 손녀선물도 구경하셨다.
마치 여행을 위해 서울에 온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