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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

by 벼리울

글을 쓰기로 했다. 나에게 주어진 단어는 '우연'.


막상 글을 쓰려니 우연이란 단어에 끄적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오래된 일기장을 헤집어 놓은 나. 우연, 그리고 운명이란 키워드로 담겨 있는 너를 발견한 건 너에 대해 글을 쓰라는 이야기겠지.


너를 만난 건 대학교 2학년, 혼자 떠난 첫 여행에서였다. 타인의 일행이었기에 어렴풋이 존재만 알던 사이인 너는 운명의 장난인지, 밥이라도 먹자며 연락처를 교환한 여자아이 덕에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 야시장에 가고 싶다는 나의 말에 ‘같이, 놀러 갈래요?’라는 한 마디를 꺼낸 너와 보낸 하루. 우연일까 운명일까, 똑같은 패턴의 옷을 입은 서로를 보며 우린 웃음 지었다. 난 너의 이별에 내심 기뻐하며 와인잔을 들었고, 그날따라 내리던 비가 그친 뒤 보이던 보랏빛 하늘도, 술집 안을 가득 채운 습기까지 전부 사랑스러워 우린 손을 맞대었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는 것도, 조잘거리는 네 입술도, 불가 얼마 전에 헤어졌다며 눈물을 훔치는 네 모습까지 사랑하게 된 것 같아 조금은 두려웠던 날. 그날따라 걷는 길은 너무도 짧아, '라오스'라는 먼 땅까지 온 이유라든가, 혼자가 된 이유에 묻기도 전에 목적지인 유토피아에 도착했다. 그 이후일까, 비포 선라이즈를 인생 영화라 말하다 입술을 포갠 것은.


왜 하필 네가 가장 기억에 남았을까. 장문의 편지로 보고 싶다 말을 건네어온 탓인지, 내 인생에 들인 너를 어찌 미워하겠어. 내가 가고 싶다던 재즈바에서 그녀를 만난 것도 우연. 네가 알려준 카페에서 너의 친구를 만나고, 그이가 나에게 고백을 한 것도 전부 우연일 테다.


운명은 유독 우리에게 장난이 많아서, 서로를 지독하게 엮고, 또 엮어 엉키게 만들었지. 풀 수조차 없는 장난에 우린 길게 이어둔 운명의 실을 잘랐다.


사실 난 우연을 믿지 싶지 않아, 네가 우울하단 이야기에 웃음 지었어. 잘 지내냐는 너의 카톡이 그토록 미울 줄 몰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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