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안식이 필요했다. 송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잠에서 깨어났고, 일을 하려다 노트북을 덮었다. 오늘은 해운대에서 오랜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다. 부산 현지인들이라 그런지 새로운 게 없다는 말에 스페인 음식을 먹기로 했는데, 부산에서 스페인 요리라니 웃음이 나왔다. 일찍 일어난 덕에 의도치 않은 여유가 생겨, 바로 옆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핸드드립 전문점이라니, 평소라면 아메리카노를 마셨겠지만 오늘은 살짝의 신맛이 필요했다. 캐리어를 입구 옆에 둔 채 주문조차 생소한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아리차' 원두를 주문했다.
드립이라 시간이 필요한 커피를 기다리며 책을 꺼냈다. 서울도서전에서 처음 구입한 도서였다. “이 책 제가 쓴 책이에요.”라며 본인의 책을 한 장 찢어서 내어준 이가 썼다는 책.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느껴진 열감에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었다. 결국 다시 돌아가 그의 책을 샀지만 말이지. 그의 일기장을 훔쳐 읽는다는 느낌에 읽기를 미뤄둔 책을 부산에서 읽을 줄이야.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글이 써지지 않으면 쓰지 말라고, 쓰고 싶어질 때까지, 쓰고 싶어 안달이 날 때까지 펜을 쥐지 말라고.” 역시나 그는 한 마디로 나를 동하게 한다. 공허한 거리에 이택민 작가의 책을 손에 쥔 채 펜으로 떠오르는 말을 끄적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을 맴도는 의무감과 책임지지 못한 일들이 떠오른다. 역시나 퇴사하던 날이 가장 상단에 남았다. 퇴사를 말한 뒤 연차를 소진하며 마지막 인사를 언제 해야 할지 몰라 미루고 미룬 지금. 어느덧 정말 끝인 8월 말이 되었다.
‘도망치듯 떠난 것 같지만, 대리님이 제 상사였던 것에 감사했습니다.’ 미뤄왔던 마지막 인사를 하나 둘 보낸 시간. 한없이 부족한 내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내가 삶에서 의미를 찾고, 그것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날. 커피가 나왔다. ‘나도 진한 향에 산미를 뿌릴까 봐, 차갑게 내려진 예가체프 아리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