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안간 내 미국 고등학교 이야기
아 참, 나 미국인이지
내 작가소개란에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를 해놓고 정작 내 브런치에는 미국 얘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오늘은 고등학교 졸업이 5년도 더 지났지만 그때 시절을 회상하며 추억도 할 겸 내 미국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엑기스만 따서 조금 해보겠다. 단, 내 경험은 텍사스에 한정되어 있다. 주마다 문화와 법이 다른 미국인지라 타주는 텍사스와는 다른 고등학교 시스템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교등학교 3년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미국은 초등학교 5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4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한국의 6학년은 미국의 중1이고, 한국의 중3은 미국의 고1이고, 한국의 고3은 미국의 고4가 된다. 2015년,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나는 16살, 고1이었다. 고로 미국에서는 자연스레 고2가 되었다.
미국 고등학교는 대학교처럼 학점제이고 내가 듣고 싶은 과목을 졸업조건에 맞춰 골라 들을 수 있었다. 말만 골라들을 수 있단 것이지 사실상 들어야 하는 과목들은 정해져 있긴 하다. 그 안에서 쉬운 버전의 수업을 들을지 아니면 조금 난이도 있는 수업을 선택해 학점에 가산점을 받을지 선택하는 정도였다. 첫 해는 지레 겁먹고 모두 쉬운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다음 해부터 하나둘씩 어려운 수업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아서 마지막 해에는 모두 어려운 수업을 골라 학점 가산점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 대학 입시시험에는 한국의 수능과 달리 SAT와 ACT라는 두 개의 시험이 있다. SAT는 독해와 수학으로 이루어져 있고 ACT는 여기에 과학이 추가된다. 그리고 이 두 시험 모두 한국처럼 국가에서 주관하는 것이 아닌 민간 비영리 조직에 의해서 운영된다는 점 역시 큰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비영리라고는 하는데 이것저것 비용이 많이 든다. 특히 SAT를 주관하는 Collegeboard라는 회사는 대학 입시 시스템까지 주관하고 있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차이점은 시험의 횟수다. 한국의 재수라는 개념은 수능이 학년말에 한 번 치러지는 do or die 형식의 시험이기에 망쳐버리게 된다면 1년을 통째로 다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SAT, ACT는 1년에 각각 7번이 치러진다. 물론 준비가 되는대로 이 7번 중 하나의 시험만 골라 응시하면 된다. 그렇기에 첫 점수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1년 안에 다시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럿 있다. 게다가 한국 수능에 비해 이 두 시험은 학교 교과과정을 엄격하게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고등학교 4학년 중 2학년까지만 마쳐도 SAT에서 출제되는 모든 문제들을 풀 수 있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들의 대부분은 고3 도중 그리고 고 4를 시작하기 직전 방학 때까지 SAT, ACT를 끝내 놓는다. 나 역시 이 기간 동안 세 번의 SAT, 두 번의 ACT를 봤었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미국 고등학교는 매 교시마다 선생들이 아닌 학생들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선생들마다 자기 고유의 교실이 있고 그곳으로 학생들이 자신의 시간표에 맞춰 찾아오는 형식이다. 내 고등학교는 당시 전교생이 800명 정도였는데, 쉬는 시간만 되면 그 모든 인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이동을 하기 때문에 2층에서 1층 복도를 내려다보면 정말 머리들만 둥둥 떠다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교사들이 자신의 교실을 갖고 있다는 것의 장점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교실을 꾸밀 수 있고 대부분 자신의 수업 스타일에 맞춰 커스터마이징을 한다. 그렇기에 수업을 할 때에도 칠판만 이용하는 것이 아닌 교실 전체를 이용하며 수업하기에 학생들의 참여도와 집중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확실히 1년 동안 같은 친구들과 붙어있는 한국의 환경과 달리 미국에선 매 수업마다 학생들이 달라지기에 학생들끼리 연대감이나 친밀감을 형성하기엔 비교적 어렵다고 느꼈었다.
그리고 학문적인 수업 외에 예체능계열의 프로그램들이 학교 자체에서 매우 발달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 두 개가 미식축구와 밴드이다. 스포츠부터 얘기하자면 축구, 야구, 미식축구, 농구, 배구 등 다양한 운동 프로그램이 남녀 각각 1군부터 3군까지 (Varsity, JV1, JV2)로 나뉘어있고 고등학교 리그가 존재한다. 그렇기에 당연히 팀마다 코치, 감독이 존재하고 개인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고4가 되면 대학에서 스카우트해가기도 한다.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문화다 보니 가끔 미식축구 홈경기를 하는 날엔 Pep rally라고 해서 아침에 전교생이 학교 미식축구 경기장 관중석으로 나와 선수들을 격려하고 응원해 주는 문화가 있다. 이 Pep rally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밴드에 있는 학생들이다. 자연스레 음악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는데, 미국의 밴드는 한국의 CNBLUE나 FT ISLAND를 생각하면 안 된다.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구글에 marching band라고 찾아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퍼커션부터 여러 종류의 관악기를 둘러메고 오와 열을 맞춰 공연을 하는 것이 marching band이고 이런 퍼포먼스를 겨루는 고등학교 대회가 있다. 규모가 큰 학교들은 밴드에만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으며 공연을 하는 것을 보고 있자면 그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에도 조금 알려진 듯한 Prom party가 있다. 대학 입시를 끝내고 졸업을 앞두고 있는 고4들이 주인공이며 졸업식 전 고등학생으로서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날이기도 하다. 학교 측에서 저녁 시간대에 파티장 같은 곳을 빌려 학생들이 춤을 추며 즐기고 경품 추천 같은 것들도 주최하는 이벤트이다. 보통 이 파티를 참석하기 전에 파티에 같이 갈 친구들이나 연인들끼리 경치 좋은 곳에서 사진들을 찍으며 추억을 남긴다. 그렇기에 남자들은 턱시도, 여자들은 드레스를 쫙 빼입고 사진을 찍는다. 여자들 같은 경우엔 같은 그룹에서 드레스가 겹치면 큰일 나기 때문에 파티날 몇 달 전부터 같이 참석하는 친구들끼리 누구는 어떤 드레스를 살지 의논하기도 한다. 내 고등학교 생활 중 이 날이 제일 미국스러웠던 것 같다. 턱시도를 처음 입어봤고 내가 속해 있던 친구무리엔 한국인이 나밖에 없었다. 열명 남짓했던 아이들이 모두 뒤풀이로 한 친구의 가정집에서 밤늦게까지 베이킹을 하고 보드게임을 하며 놀았던 기억까지 생생하다. 생각해 보면 미국이란 나라치고 참 귀엽고 건전하게 놀았던 것 같다.
이제 학부를 졸업하고 의대를 준비하며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 다시 돌아봐도 고등학교 때가 가장 내가 미국스러웠던 때였다. 어리고 비교적 겁이 없고 호기심 많던 시절이라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치열하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와중에는 내가 지금 미국이라는 사실을 딱히 실감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뭐 이민 온 지 10년이 넘어가니 이젠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Korean-American이 돼 가는 와중, 내 미국 첫 3년,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