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리와 실비아 플랫(Sylvia Plath)
가수 겸 배우 최진리가 세상을 떠났다. 성남 수정 경찰서에 따르면 그녀는 평소 우울증을 앓았다. 2014년 악성 댓글과 루머 등으로 연예 활동을 잠정 중단했다. 고인은 자택에서 홀로 살았다. 유가족은 평소 그녀에게 자주 연락을 취하고 집에 찾아갔다. 그녀는 다이어리에 괴롭다고 적었다. 그리고 지난 14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장례는 공개되지 않았다. 빈소와 발인 등 모든 절차는 조용히 진행됐다.
볕이 드리우면 그늘이 진다. 그녀는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동시에 그늘 속에 지냈다. 공인과 보통 사람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수년간 해왔다. 실제 생활은 구렁텅이지만 밖에서는 밝은 척을 했다. 어떤 사람이든 다 뒤에 어두운 부분이 있다면서. 하지만 그늘을 가리며 지낸다. 삶의 양면성이다.
시인 실비아 플랫도 그늘 인생을 살았다. 시 <에어리얼(Ariel)>에서 그녀는 검은 열매들이 던지는 어둠의 갈고리(Nigger-eye berries cast dark hooks)에 굴복한 채 산다. 아버지는 자살했다. 그녀도 9살 때 한 번, 10년 뒤 다시 한번 아버지를 따라가려 했다. 또 남편은 계관시인(Poet Laureate)이었지만, 실비아는 생전 시인으로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 남편은 바람을 피웠고, 바람 상대는 임신을 했다. 실비아는 아이가 둘이다. 신경은 쇠약해진다. 그늘 속에 인생이 빨려 들어가는 형국이다.
한편 그녀는 말타기를 즐겼다. 영국 다트무어의 초원에서 말과 달렸다. 말 이름도 에어리얼이다. 템페스트 속 마법사 프로스페로(Prospero)의 계약에 묶여 지내는 요정도 같은 이름이다. 에어리얼과 초원을 누비는 그녀는 비로소 자유롭다. 에어리얼은 히브리어로 신의 사자(God’s lioness)다. 그녀는 신의 사자와 하나가 된다(How one we grow). 에어리얼은 그녀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고(Hauls me through air), 그녀는 벌거벗는다. 날것 그대로가 된다. 수치심을 버리고 나체로 말을 탄 레이디 고디바(Godiva)처럼 통제와 핍박을 벗어던진다. 그리고 말과 하나 돼 자살하듯 화살처럼 새로운 삶을 향해 뛰어든다.(I am the arrow…Suicidal, at one with the drive into red eye.)
1963년 실비아는 세 번째 시도를 감행한다. 그녀는 주방 문틈을 막고, 오븐 가스를 틀었다. 생명은 가장자리(Edge)를 넘어, 강을 건넜다. 결국 “여인은 완성되었다. 그녀의 죽은 육체는 성취의 미소를 띤다(The woman is perfected. Her dead body wears the smile of accomplishment)”.
실비아의 그늘 인생은 우리에게 맹점이다. 업적이 가린 등잔 밑 그림자다. 실비아뿐이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주머니에 돌을 가득 담고 강물에 빠졌다. 헤밍웨이는 권총을 자신에게 쏘고 생을 마감했다. 고흐도 가슴에 총을 겨눴다.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갔지만 숨을 거뒀다. 일본의 셰익스피어 나쓰메 소세키는 평생을 신경쇠약과 함께했다. 우리는 이들을 대문호 혹은 거장이라 부른다. 어둠 속에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려 고군분투한 위인들이다. 동시에 보통사람이다. 단지 나 자신이 되려, 몸부림치는 정도가 우리와 달랐을 뿐이다. 최진리도 그러했다.
우리는 보통사람의 세상에 산다. 아무리 돌아봐도 우리 같은 사람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평가한다. 판단하고 재단한다. 하지만 우리는 옆 사람을 바라보며 세웠던 편집점을 의심해야 한다. 볕과 그늘 그 경계선에서 시야각을 넓히지 못했는지 반문해야 한다. 나쓰메 소세키가 보통사람의 세상에 대해 역설한 문장으로 글을 맺는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가까운 이웃들과 오가는 보통 사람들이다. 보통사람들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힘들다고 해서 옮겨 갈 나라는 없을 것이다. 있다면 사람도 아닌 사람의 나라일 뿐이다. 사람도 아닌 사람의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욱 살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