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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Nov 11. 2019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에

자취를 시작하면서, 눈뜨면 라디오를 틀어대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유독 방음이 잘 되는 방에다 동네도 한적해, 가끔 진공관 안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다. TBS 라디오와 MBC 라디오를 기분에 따라 번갈아 듣는데, 며칠 전부터 후자를 택한다.      


라디오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는 창구다. 묘하게 공감되는 이야기들도 종종 등장한다. 그럴 때면 ‘허허’ 하며 아저씨 웃음을 짓곤 한다. DJ가 중간-중간 소개해주는 사연들도 매력적이지만, 백미는 방송 시작을 알리는 들어가는 이야기다. 그 날은 골든디스크의 오프닝이 꽤 마음에 들어 포스트잇에 적어뒀다. 대충 이랬다.     


존재를 사소하게나마 기억해주는 게,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은 이상, 우리의 기분을 뿌듯하게 합니다. 존재는 타인의 관계에 의지하기 때문이겠죠. 그러니 조금씩 서로 이야기하며 훈담을 주고받아요.

며칠 전 소주 한잔 하고 싶은 날이 있었다. 모두 피곤하다며, 바쁘다며 자리에 함께하지 않아 흐지부지 될 뻔한 소주 한잔. 뒤늦게 도착한 동생이 발을 동동 굴리며 고민하던 사이, 딱 각 1병씩만 하자고, 깔끔하게 열두 시에 집에 가자고 말했다. 귀가 얇은 탓인지, 얘도 그날 소주를 마시고 싶었는진 모르지만, 일단 메뉴판을 가져왔다. 그리곤, 이름이 이상한 소곱창탕을 시켰다. ‘소찌탕’이었던 것 같은데. 얼큰한 술 안주탕이었다.  


그날따라 꽤 빠르게 마셨고, 안주 이름처럼 이상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던 기억이다. 그러다 자기소개서 공장장 같은 일상을 이야기하니, 앞자리에서 일침이 날아왔다. ‘오빠는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자소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금 이상하다’며. 정확한 워딩은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의도는 그러했다. 요 근래 자주 만난 걸 제외하면, 거의 일 년 만에 만났으니까. 그때 나는 지금과 많이 달랐나 보다.     

 

그 자리 바로 전에, 집에 먼저 간 친구는 나에게 작은 고민을 털어뒀다. 지금 연인의 전 상대에 관한 이야기였다. 전 상대가 지금 연인에게 전화를 한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새벽에 술 먹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그 친구는 한탄했다. 너무나 좆같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한다며. 나는 거기에 맞장구를 쳤었나. 만취상태로 새벽에 전화를 한다는 그 사람이 참 바보 같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던 기억이다. 아니다 정확히는 ‘멍청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애가 네 연인에게 전화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잘 나가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아닐까. 지금의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자신이 괜찮았던 기억을 다시 되찾고 싶어서. 그래야 지금의 자신도 비로소 바로 설 수 있다고 생각돼서 말이야. 그 이기적인 행동을 상대가 싫어하고 도리어 실낱같이 남아있는 인연의 끈마저 잘려나갈게 뻔한데. 그래서 참 멍청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어. 적확한 전략은 아니잖아. 뇌에 주름이 있다면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 멍청해 정말.”     


가감 없이 속사포로 이야기했다. 왜냐면 몇 해 전 나는 그 만취전화남이었다. 그리고 그 비루했던 과거가 개미 발톱만큼이나마 나를 개선시켰다고 믿었다. 이전 연애는 그만큼 나한테 중요한 기억이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이전 연애를 물어본다. 마음이 가는 사람이 생기면 더 집요해진다. 질문공세를 퍼붓기도 한다. 물론 나름의 젠틀함을 엮어서. 전 연애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척도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나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물어야 이 사람이 나라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감당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연애를 다시 시작하면 전 연애를 지우는 행동이 참으로 아쉽다. 전 관계가 있어서 지금 이 사람이 내 옆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전 연애도 이 사람 어딘가에 남아 있을 텐데. 마치 개종하듯 과거를 지워버리는 건 참 못된 짓이다. 다시 시작하는 연애가 재사회화의 과정은 아니지 않은가.      


안주 국물이 쪼그라들어 물을 부었다. 나름 잘 채워갔다 생각했는데, 그 일면식 없는 만취전화남에게 훈수를 줄 정도는 된다 생각했는데. 소찌탕 자리에서 들었던 말은 그 자만을 산산조각 냈다. 그간 관계들로 한없이 앓아가며 내공이 쌓였다고 착각했나.


생각해보면 그때 그 모습도 나쁘지 않았는데. 난 상대를 그대로 두고, 나를 지웠나 보다. 소찌탕에 조금은 고마운 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에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파블로 네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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