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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범 Nov 07. 2019

카페에서 엿들은 이야기

언젠가 그린 페이스라는 새로 생긴 카페에 간 적이 있어. 일요일 열한 시쯤이었을 거야. 주말 오전 시간에 동네 카페를 가면 그렇게 한적할 수가 없거든. 카페를 전세 낸듯한 기분. 주인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한몇 시간 정도 손님이 오지 않길 바라기도 해. 꽤 진득하게 빌어봤는데도 사람들이 어김없이 오더라고. 아주머니 무리도 있었어. 동네 카페라 그런가 봐. 이내 꽤나 소란스러워져. 천정이 높은 카페인데, 반지층이라 그런지 사람들 이야기가 천정에서 한번 벽에서 또 한 번 튕긴 뒤에 여기저기 울려서 신경 쓰였어. 하하호호 그 통쾌한 웃음들도 같이 들렸지. 노래를 들어야 하나 싶더라고. 노래를 들으면서 책 읽는 거만큼 집중 안 되는 상태도 없는데 말이야. 단념하면서 헤드셋을 찾는데 안 가지고 나왔더라고. 하 참. 갈수록 태산이야. 커피는 반절도 안 마셨고, 나가서 다른 카페를 찾기엔 내 용기와 노력이 현저히 부족했지. 억울했어. ‘왜 그 많은 카페들 중에 하필 그린 페이스를 고르셨나요. 여러분.’ 아주머니들 수다방을 엿들은 건 그때쯤이었을 거야.     


“우리 애는 송현아라고 하더라고. 무슨 연예인 이름인가 싶었어.” 맞은편 아주머니는 “누군데, 송나무 송? 사람 이름 아니야? 요즘 애들은 참 별걸 다 줄여. 감도 안 온다 얘”     


우리는 송현아를 알잖아. 그치. 어디를 줄인 말인지. 무엇을 말하는지. 다행이라고 생각해. 송현아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마침 송도에 자주 들렸고 줄임말을 해독 없이 해석할 만큼 어렸거든. 물론 지금도 어리지만. 지금 송현아를 들었다면, 아무래도 몰랐을 거야. 나도 아주머니들처럼 배우 이름인가 하고 검색해보지 않았을까. 그것이 송도현대아울렛을 말한다는 걸 알게 된 순간에는 자조적인 실소를 보냈겠지. 묘하게 슬펐을 거야. 아주머니도 “요즘 애들이랑은 이야기하기도 힘들어”라며 말을 이어갔거든. 거리감을 느끼셨겠지.      


얼마 전에 할로윈이었잖아. 어젯밤에 횟집에서 친구들이 할로윈 사진을 보여줬어. 자기들은 “할로윈마다 모여서 논다고”, “정말 이쁘지 않냐고” 하면서. 사진은 이쁘게 나왔어. 분장도 잘됐지. 할로윈 분장 알잖아. 피 흘리고 허옇고 귀신의 집에서 나올법한 모습. 나도 작년에 비슷한 분장을 했거든. 그때 사진을 보여주면서, “너네 분장 정말 잘됐다고”, “어디서 했냐고” 물어봤어. 나 빼고 셋이 동시에 웃었어. 어플이래. 어플이 대신 분장을 해준 거래. 자조적인 실소. 묘한 슬픔. 지금도 조금 쓰려. ‘자만추’를 물어볼 때나, ‘~누체’를 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야.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다름과 차이를 느꼈을 때 드는 기분이야. 이윽고 한없이 그 자리에서 멀어져. 아득하게 말이야.      


나는 송현아를 송현아라고 불러. 그 편이 자연스럽거든. 가끔 버정도 버정이라 불렀어. 물 흐르듯이 말이야. 그런데 ‘~누체’를 맛깔나게 말하진 못해. 자만추를 입에 올려도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어. 나도, 듣는 사람도 그렇겠지. 그래도 가끔은 어색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어. 그리고 그 상황들이 축적돼서 관계라는 게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이를 소속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동질감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 그것들이 벽돌처럼 하나하나 쌓아 올라가.      


벽돌담을 쌓는다고 생각했어. 사실 그렇지 않더라고. 알고 보면 그 관계라는 게 9월까지 살아남은 코스모스처럼 여려. ‘이 정도면 한 발짝 다가가도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힘껏 쥐려 하면, 그 관계가 으스러지진 않을까 지레 겁먹어. 실제로 시도해도 잘 되지도 않고 말이야.      


그러니 우리 모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묵언수행을 하고 있으면 한없이 침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 내가 자만추를 송현아처럼 말하지 못한다는 걸 스스로 잘 알거든. 어쭙잖게 다가가는 게 벽돌담에 금을 내는 짓이라는 것도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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