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수화기를 들기 어려웠다. 손가락에 인이 박힌 듯, 오른손은 뭉툭하게 생긴 전화기를 집기 두려웠다. 인사를 건네면 아득하게 멀어졌다. 안부는 생경했다. 침묵은 듬직했다. 무언의 순간에 기대는 나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웠다. 닻을 내리지 못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꼴이다. 말이 섞이는 소용돌이에 하염없이 빨려 들 것이다. 결단이 필요했다.
최초의 전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집 앞 중국집이 생각난다. 새천년 매주 주말 점심을 그곳에서 시켰다. 아버지의 굳은 의지다. 그는 짜장면파다. 어머니는 짬뽕, 갓난 동생은 노란 단무지다. 나는 탕수육을 담당했고, 전화 주문을 겸했다. 그 중국집 아저씨는 인상이 고약했다. 수화기 너머로 그의 주름진 미간과 부리부리한 눈매가 떠올랐다. 전화를 관두고 중국집으로 달려가 주문을 했다. 4층에서 1층으로, 다시 200미터 정도를 뛰었다. 메뉴는 그 집 아들이 받았다. 그는 귀가 들리지 않았던 기억이다. 메모지에 몇 자 적어 건넸다. 몇 번을 그랬다.
베트남 호치민에는 중국집이 없었다. 아버지의 의지는 그곳에서 비롯됐을까. 한국에 돌아오실 때면 몇 안 되는 그의 주말 점심을 중국집에 투자했다. 그러시곤 다시 출국하셨다. 그는 자식들이 그리우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국제전화를 걸곤 했다. 수화기 바통은 이내 나에게 전달됐다. 몇 마디 못하고 끊기 일쑤였다. 아버지의 그리움은 나에게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에 부응할 만한 대답을 끝내 찾지 못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우리를 그리워하지 않아도 됐다. 나는 10대 후반을 베트남에서 보냈다. 가족 모두 같이 지냈다. 입시도 치렀다. 모두 떨어졌다. 어머니는 내 좌절을 걱정했다. 무너지진 않았다. 대신 해방감에 취했다.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폈다. 마음에 금이 갔다면, 그 둘이 메꿔줬을 것이다. 얼큰하게 취한 채로 10대 마지막 밤을 보내다, 어머니 전화를 받았다. 한껏 상기된 목소리. 대학본부는 당사자 부모에게 합격통보를 전했다. 어머니 목소리는 평소보다 두 톤이 높았다. 어머니도 나름의 해방감을 느끼신 걸까. 내 입시는 아버지의 그것이 그러했듯, 어머니에게 가볍지 않았다. 죄스러워 길게 말을 잇지 못하고 끊었다. 다시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폈다.
담배는 군대에서 늘었다. 쉴 때마다 폈다. 휴식시간 8할은 흡연장에서 보냈고, 그때마다 옆 빨간 전화박스를 애용했다. 3만 원짜리 선불용 전화카드는 1주일이 채 가지 못했다. 빨간 박스는 거의 유일한 소통창구였다. 수화기 너머 삶을 그리워했다. 전해오는 음성으로 내가 있었던 곳을 상상해야 했다. 내 과거가 낯설었고, 들리는 목소리는 생소했다. 미묘하게 변한, 한 때는 익숙했던 목소리와 때때로 서먹했다. 인연의 끈을 한낱 전파로 지탱하는 모습에 억울했다.
한 번은 억울했다. 두 번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더블린에서 맥주를 팔며, 주말 저녁에는 전화를 했다. 미약한 와이파이에 의지해 여러 번 걸고 받았다. 어떤 전화는 받기 어려웠다. 인사를 건네면, 내가 밟고 있는 더블린 땅이 느껴졌다. 나는 이역만리에 임시거처를 뒀다. 짜장면집주인의 인상을, 아버지의 그리움을, 어머니의 흥분을 분명 느꼈지만, 그곳에서는 수화기 너머 목소리 주인을 가늠할 수 없었다. 목소리는 구체적이었고 즉각적이었다. 귀에 박히고 이내 휘발됐다.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 틈에 나는 기댔다. 짧은 침묵은 길게 느껴졌다. 그곳은 이곳을 몰랐고, 나는 그곳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연결 상태가 온전치 못해 간헐적으로 목소리가 끊겼다.
영겁 같은 찰나의 순간에는 기쁨과 슬픔, 아픔과 좌절이 있었다. 쉬운 전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도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날 나는 지상으로 내려와 두 발로 땅을 밟았다. 그러고 보니 일 년 전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오늘은 이틀 뒤 입대하는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입대는 그가 함께 자리했다. 이틀 뒤 나는 그러지 못한다. 그는 익숙했던 목소리들과 서먹하지 않길 내심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