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이야기(1)

피해자와 가해자 그 복잡한 관계(1)

by 고장난시계

나의 과거를 완전하게, 정확하게 돌이켜 보기 위해서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사실 ABJ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나를 열 달이나 뱃속에 품어주고, 내 입으로 넘어간 첫 음식인 젖을 내어주고, 나를 키워준 엄마를 끊어내기까지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고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한때는 나 스스로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엄마를 미워하는 내가 너무 미워서.
이런 내가 이해되지 않아서.


임신 막달에 ABJ에게 머리채가 잡혀 뇌진탕이 오는 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태어난 여동생의 딸을 품에 안으면서 드는 생각은 또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조카라고 해도 이렇게 예쁜데 엄마는 왜 나에게, 그리고 내 동생들에게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살아남는데 방해가 되는 고민들은 가슴 한켠에, 머리 한구석에 꽁꽁 싸매두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학 입학이라는 핑계로 집을 나온 후에야 그동안 나를 혼란하게 만들었던 문제들과 비로소 마주했다.

사실 20대 초반에 온갖 심리학 책을 섭렵했던 이유도 그린 듯한 나쁜 놈인 ABJ보다 엄마 때문인 것이 더 크다.


모든 부모마다 저마다의 훈육방식이 있다.

어떤 부모는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아이를 키우기도 하고,

어떤 부모는 회초리를 들기도 하고 벌을 세우기도 한다.

뭐 때리는 부모도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나도 충분히 경험했으니.

그러나 나의 엄마와 같은 훈육방식은 훈육이라기보다 아동학대에 가까웠다.


아니 아동학대였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나와 고작 2년 터울이 지는 여동생과 함께 크면서 다른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여동생과 많이 싸우면서 컸다.

지금은 세상에 우리 단 둘밖에 없는 피붙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릴 때는 정말 수많은 이유로 무수히 많이 싸우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7남매나 되는 자신의 형제들을 늘 언급하면서 7남매가 크는 동안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의 형제자매들이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외할머니가 마흔에 낳은 7남매 중의 막내인 엄마는 막내이모와도 열 살 넘게 차이가 나기에 엄마가 외갓집에서 자라는 동안 다른 외삼촌들과 이모들은 이미 취업이나 결혼으로 외갓집을 떠난 상태였고, 타지에 나가 있던 외삼촌들과 이모들이 버스가 하루에 두 번밖에 오지 않는 경상도의 아주 작은 깡촌에 있는 외갓집에서 만난다 해도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이 서운함이나 속상함보다 커서 모든 것을 덮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터울이 많이 지는 엄마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엄마의 형제자매들도 다른 형제자매들처럼 많은 이유로 무수히 싸우면서 컸을 것이다.


일례로, 대구에 사는 둘째 이모는

어린 나이에 속도위반으로 결혼하게 된 엄마가 안타까워 큰외삼촌이 큰맘 먹고 결혼자금으로 마련해 준 목돈을 엄마는 물론 다른 식구들 몰래 빼돌려 탕진한 경력이 있고


큰외삼촌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말하지도 않고 외할머니의 재산을 독식했다.

이런 형제자매들이 어떻게 크면서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엄마는 이런 모순에 대해 단 한 번도 의문을 갖지 않은 것처럼,

우리 자매가 싸울 때마다 자신의 형제들을 들먹이면서 우리를 혼내고는 했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싸우게 되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그저 우리 자매가 울고, 소리 지르고, 서로를 때리는 상황 자체에 화가 난 듯했다.

그리고 화가 난 엄마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우리 자매를 속옷만 입혀 ‘내 집에서 나가라’라며 밖으로 내쫓기도 하고 - 계절도 가리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때리기도 했다.

그래도 밖으로 내쫓기거나 맞는 것은 괜찮았다. 잠깐 아프고 잠깐 창피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우리 자매를 벌준다는 명목으로 나와 내 동생을 바닥에 눕힌다음 우리 두 사람의 머리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온 집안에 끌고 다니는 것이었다.

두피가 뜯어져 나갈 것 같은 아픔과 머리채가 잡혀 바닥에 끌려다닐 때 여동생과 나는 여러 곳에 부딪힐 수밖에 없어 너무나 공포스러웠다.

그리고 이런 학대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언젠가 한 번, 여동생에게 그때의 일이 기억나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마 웬일로 친구도 없어 늘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엄마가 모처럼 집을 비운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자 내 동생이 말했다.
”언니, 나는 그때 일이 너무나 끔찍해서 꿈인 줄 알았어. “


내 동생은 나를 통해 그때의 일이 꿈이 아니라 진짜로 벌어진 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한참이 흘러서, 아마 내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3년간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로 기억하는데 나에게 그때의 일을 조심스레 말한 적이 있다.


엄마한테 그때 우리한테 왜 그랬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
근데 엄마가 그러더라. 자기는 기억 안 난다고. 그래서 나도 더 이상 안 물어봤어.


엄마는 늘 이런 식이었다.

당시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성인이 되어서 뒤늦게 그때 있었던 일들의 의미를 깨달은 우리가 그 일에 대해서 물어보면 엄마는 자신이 불리한 얘기에는 늘 모르는 일이라고 일축했다.


설령 진짜 잊어버린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딸 둘의 머리채를 잡아 온 집안에 끌고 다닌 일을 엄마는 잊어버렸다고 해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위로의 말을 해주길 바랐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엄마가 정말 그랬다면 미안해‘라는 정도의 조건부 사과라도 했다면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애틋함을 느꼈을 것 같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엄마의 태도 덕분에 나는 더욱 홀가분하게 더욱 단호하게 엄마와의 인연을 정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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