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상담

위로의 방법

by 고장난시계

9년간의 왕따 생활을 거쳐,

드디어 내가 왕따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서울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막연히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왕따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다시 왕따로 살고 싶지 않다는 소망에서 그런 바람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그런 사람이 좋아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나에게 감정적으로 기대올 때마다 참 힘들었다.

나를 믿고,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고맙긴 했지만 사실 나는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느라 몸이 뻣뻣하게 굳고는 했다.


이 사람이 지금 나에게 바라는 것은 뭘까.
지금 내가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적절할까.
제대로 된 위로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맞나.
내가 위로를 잘하지 못해서 이 관계가 틀어지면 어쩌지.


이런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때가 많아서, 나는 한때는 진지하게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러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아서 나중에는 그런 상황이 부담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전긍긍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나를 떠나갈까 봐. 그리고 다시 혼자 남게 될까 봐.


그리고 참 나 스스로가 한심했다.

남들은 말도 잘하고, 리액션도 잘하고, 위로도 잘하고 모든 것을 척척 잘하는 것 같은데 나는 왜 병신같이 이런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나.

이래서 왕따를 당했나 하는 생각까지 해봤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냥 무턱대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그 어떠한 부탁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들어주는 것. 그러면 적어도 이 관계가 망가지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나 자신에 대한 속상함은 꾹 누른 채. 그리고 가끔은 나의 친절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면서도 애써 못 본 척하면서.


상담사의 말에 따르면 ‘위로를 잘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언제나 변화무쌍한 것이라서

어느 날에는 적절한 위로였다고 할지라도 다음날이면 똑같은 사람에게 똑같은 위로를 건넨다고 하더라도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그래서 적절한 위로라는 것은,
그냥 ‘눈과 귀를 열어 이야기를 잘 듣고,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해’가 아니라 ‘인정’


사람은 저마다 거쳐온 시간과 쌓인 경험이 다르기에,

똑같은 A라는 상황을 두고도, 저마다 느끼는 감정과 해결책은 알파부터 오메가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이해’를 하기보다는 A라는 상황에 대해서 상대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인정하고 제멋대로 평가하거나 재단하지 않고 잘 들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위로라고 말했다.


그것을 몰랐던 부족했던 나는,

내가 거쳐온 시간과 쌓인 경험에 빗대어 내게 털어놓은 몇몇 친구들의 감정적인 고민들을 가볍게 여기고 그들을 질투한 적이 있다.


서울에 살면서, 등록금은 물론 생활비까지 넉넉하게 받는 환경에서,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내 친구들이 나에게 털어놓는 고민은

사실 그 나이 때 친구들에게는 흔한, 그리고 어려움을 겪는 것이 당연한 ‘진로에 대한 고민’, ‘학업에 대한 고민’, ‘연애에 대한 고민‘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과연 이 시험을 계속해서 준비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고민‘은 사치스러운 것이었고 ‘올해 이 시험에 합격하는 것’ 외에는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며,

‘잘 나오지 않는 성적에 대한 고민‘은 노력이 부족한 것 외에는 별다른 핑계를 생각하기 어려웠고,

‘소원해진 애인과의 관계’ 같은 것은 내 인생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그런 것들을 고민이라고 털어놓는 친구들이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한심해 보였다.


그 고민들을 듣고 있었던 나는,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와중에도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가느라 단 1분이라도 더 공부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고,

엄마가 ABJ에게 맞아 전치 16주의 상해를 입는 사건 등등이 발생해 이제 겨우 1차 시험을 합격한 국가고시는 물론 대학을 포기할 위기에 몰려 있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여동생에게 모든 짐을 떠 맡긴 것은 아닌지 늘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 이런 고민들을 안고 있는 나에게

내 친구들의 고민은 너무나 가볍고 보잘것없게 느껴진 게 사실이다.

그래서 부럽고, 질투가 나고, 그리고 친구들과 다른 환경에 놓인 내가 너무나 불쌍하고 속상했다.

친구들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려 죽을힘을 다해 이런 부끄러운 감정들이 표가 나지 않도록 애썼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도 모르게 행동으로 튀어나올 때가 있어 스스로 깜짝 놀란적도 있다.


내가 아무리 가정폭력과 왕따의 피해자라고 하더라도 내 친구들의 고민이 가볍다거나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위로를 잘하고 싶으면서도 이런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는 상황이 참 힘들었다.


나의 솔직한 고백에 상담사는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아마도 XX님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인정해주지 않았기 떄문에, 다른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힘들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먼저,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연습부터 해주세요.


아, 나는 솔직히 나 자신에 대한 위로가 먼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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