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야기(2)

나를 가로막던 엄마의 말

by 고장난시계

지금의 나는 엄마를 미워하고 또 미워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엄마가 나의 존재를, 내가 이뤄낸 모든 것들을 질투한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위 두 가지 사실을 인정하기에 이를 때까지의 시간들은 혼란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길 가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적어도 2명은 마주칠 정도로 얼굴도, 체형도, 옷차림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성격 또한 남들 앞에 나서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하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나도 다른 사람들이 굳건하게 믿는 것처럼,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엄마일 줄 알았다. 어쩌면 엄마 자신보다 더 나를 사랑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믿음을 전제로 했을 때, ‘엄마가 나를 질투한다’라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니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하는 모든 말들은 ‘나를 아끼는 마음에,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 나온 것’이라고 믿었기에 엄마가 나를 질투한다던지 시기한다는 감정의 불순물이 섞일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굳건한 믿음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을 때 언제나 괴리감이 찾아오는 법이다.
괴리감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초래했고, 가장 기본적인 애정의 근원이었던 ‘엄마의 사랑’이 흔들리자 내 존재조차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는 내 자신이 미웠다.


한 때는 내가 너무 미워서,

엄마의 말과 행동들이 보여주는 적나라한 모순들을 모두 외면한 채 ‘엄마가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엄마가 나를 제일 잘 아니 엄마 말이 모두 맞을 거야’라는 얄팍한 거짓말로 나 자신을 속이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커 갈수록 외면할 수 없는 현실들은 내 눈을 아프게 찔렀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었을 때, 나는 ‘과학고등학교 진학‘이라는 방법을 통해 처음으로 지긋지긋한 집에서 탈출하고자 시도했다.

과학에 특별한 흥미는 없었지만,

내가 왕따라는 것을 아는 다른 애들과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함으로써 또다시 왕따가 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었고 아울러 전교생이 기숙사생활을 해야 하는 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집을 떠날 수 있다는 점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 과학경시대회에서 수상한 경력과 월등한 중학교 내신성적이 과학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고.

그러나 엄마는, ‘아직 어려서 집에서 내보낼 수 없다‘라는 말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말만 들어보면 단순히 어린 내가 집을 떠나 생활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은 내가 없으면 엄마의 ‘ABJ와 시댁식구들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험담과 자신의 불쌍한 신세타령’을 받아줄 사람이 없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는 딸이기보다 전적으로 엄마 편에 서서 ABJ를 증오하는 엄마의 믿음직한 친구이자 보호자였으니까.


아니 이제는 솔직하게 인정하자.
나는 ‘엄마의 감정쓰레기통’이었다.


지옥 같은 3년을 보내고, 드디어 나에게도 합법적이고 강력한 ‘대학입학’이라는 탈출기회가 찾아왔을 때,

엄마는 또다시 ‘딸자식을 눈뜨고 코 베일 서울로 보내는 것이 걱정된다. 여자니까 마음 편하게 지역에 있는 교대에 입학해서 선생님이 되는 게 제일 좋다‘는 허울 좋은 말로 나를 가로막으려 들었다. 그러나 내 꿈이 ’선생님‘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지방의 여고답게 ‘인서울 대학입학’이 곧 학교의 큰 자랑이 되는 시대였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부추김과 선생님들의 적극적인 권유로 나는 마침내 집을 탈출했다.


서울에서 혼자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공부와 아르바이트가 생활의 전부인 내가 어쩌다 집에 내려갈 때면, 엄마는 내게 옷을 주고는 했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지만 ‘옷을 사준 것’이 아니라 ‘옷을 준 것’이다. 그 말인즉슨, ‘엄마가 오래 입다가 질렸지만 버리기에 아까운’ 내지 ‘엄마가 입으려고 샀지만 마음에 안 든’ 옷을 내게 주었다는 의미다. 당연히 엄마의 취향은 20살인 내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별달리 옷 살 돈도 없고, 옷차림에 신경 쓸 여유도 없어서 나는 그냥 꾸준히 입고 다녔다.


영하로 떨어지는 한파에도 엄마가 준, 오래되어서 낡고 밋밋한 코트 1개 만을 주구장창 입고 다니는 내게 대학 동기들이 ‘혼자만 교복을 입고 다닌다’며 우수개소리를 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서울 생활에 지쳐 파리한 얼굴로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딸에게 한 번쯤은 티셔츠라도 하나 사줄 법도 한데, 엄마는 ‘서울 물 먹더니 얼굴이 폈다’라고 얘기할지언정 그런 일은 없었고 어쩌다 내가 하나 사입은 5,000원짜리 티셔츠 하나 또는 나를 여동생처럼 예뻐해 주는 마음 넉넉한 선배가 선물해 준 패딩에 엄마는 ‘엄마도 한 번 입어보자, 나중에 안 입게 되면 엄마 줘’라며 시샘 어린 태도를 보이고는 했다. 그러한 태도를 통해 짐작하건대, 엄마는 자신의 20대 때와 달리 내가 서울에서, 그것도 혼자 자유롭게, 남들이 다 아는 유명대학에 다닌다는 것이 부러웠던 것 같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교에 진학한 것만으로도 내게 많은 기회가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

누구는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한 덕분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가볼 수 있었다. 여행이 아니라 봉사활동이었기에 캐나다나 미국과 같은 선진국이 아니라 화장실도 제대로 없는 낙후된 나라에서 하루에 10시간을 봉사활동으로 보냈지만 그래도 덕분에 일주일 치 식비도 되지 않는 돈으로 2개월을 다른 나라에서 지낼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나마 엄마에게 해외 봉사활동을 가는 것에 대해 허락을 구하던 날, 엄마는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황당하게도 나만 그렇게 해외에 가게 되면 다른 두 동생들이 부러워한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내 동생들은 고등학생, 중학생이어서 저마다 학업에 바빠 내 출국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엄마가 부러운 것이면서도 엄마는 그렇게 동생들 핑계를 대는 모습이 황당했다. 그리고 내 짐작이 맞은 것처럼, 내가 해외 봉사활동을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이모들과 돈을 모아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나라로 해외여행을 갔다.


내가 국가고시를 준비할 때도 엄마는 나를 막아섰다.

명문대 대학생이라는 신분이라서 가능했던 고액 과외를 통해서 어느 정도 돈을 모아둔 나는 남들보다 한참 늦기는 했지만, 평생 동안 유지되는 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 국가고시에 도전할 생각임을 알렸다. 당시에도 지금만큼 취업이 쉽지 않았기에 유학경험도 없고, 별다른 스펙도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판단을 내린 후였다. 그러나 엄마는 합격하는데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국가고시를 준비하느니 학교를 제때 졸업해서 취업을 하는 게 나을 거라고 말했다.


’취업하면 엄마한테 다달이 30만 원씩 줘야해‘라는 말을 덧붙이며.


사실 국가고시라는 큰 도전을 앞두고 나를 가로막는 엄마의 말은 예전처럼 나를 상처 입히지는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학습되어 왔기 때문일까.


그냥 ‘그럼 그렇지’하는 생각이 들었고 ‘응원’이라던지 ‘지지’라던지 그런 것을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단지 모아둔 돈을 다시 한번 계산해 보고 적어도 2년은 걸릴 국가고시에 합격할 때까지 다달이 들어갈 돈을 머릿속으로 헤아려봤다.


장시간에 걸쳐 너무 오랫동안 책을 보는 바람에 눈의 실핏줄이 터져 피눈물이 흐를 정도가 되어서야 국가고시에 합격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무슨 말을 기대했던가.

합격자 발표날에도 엄마의 얼굴은 ABJ에게 맞아 시퍼런 멍이 들었고, 엄마의 또다시 반복되는 신세타령과 ABJ에 대한 험담을 들어주느라 나는 전화기 너머로 입술만 달싹거리면서 ‘엄마 나 합격했어’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엄마의 전화를 끊고 여동생에게 합격사실을 알렸다.


국가고시에 합격한 후, 남들이 보기에도 번듯한 회사에서 본격적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엄마의 나에 대한 질투와 시기는 피부로 느껴질 만큼 강해졌다.


회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수밖에 없는 정장과 구두, 처음으로 가져 본 핸드백 그리고 다달이 내 손에 쥐어지는 월급 등 모든 것을 엄마는 질투했다.

회사를 다니거나 하다못해 출근용 정장을 입어본 적도 없으면서 엄마는 한사코 자신이 고른 정장과 구두를 사도록 강요했고, 급기야는 국가고시를 준비할 때도 해주지 않던 각종 반찬을 서울에 있는 내 자취방으로 보내거나 불시에 내 자취방에 들이닥쳐 청소를 해주기 시작했다.


엄마의 사랑이라고 애써 포장하기에는,

엄마가 해준 반찬은 내가 잘 먹지 않는 것인 데다 또한 그 양도 너무 많아서 집에서 하루에 한 끼 챙겨 먹지도 못하는 나에게 너무나 큰 부담이었고 - 그래서 대부분 오랫동안 냉장고에서 버티다가 곰팡이가 피는 순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 엄마가 청소를 한다고 내 자취방을 마음대로 들 쑤신 날에는 정리해 두었던 책과 중요한 자료들의 위치가 뒤죽박죽 섞여 똑같은 일을 다시 해야만 했다.


무엇보다 나를 화나게 하고 엄마에 대해 큰 실망을 하게 했던 것은,

내가 국가고시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이 모두 엄마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있어 가능했던 것 마냥 다른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니고,

내가 국가고시에 합격한 것이 마치 엄마가 국가고시에 합격한 것 마냥 나를 내세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체면을 세웠던 점이다.


때문에 나는 일주일에 적어도 이틀은 밤을 새워야 하는 과중한 업무 속에서도 엄마의 체면치레 때문에 친인척들의 온갖 고충을 상담해 주어야만 했다. 그리고 근무시간임에도 회사 앞으로 우르르 몰려온 친척들 앞에서 그들의 고충을 상담해 준 것도 모자라 웃는 낯으로 기념사진도 찍었다.


엄마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막대한 양의 반찬을 보내는 것으로, 불시에 들이닥쳐 내 자취방을 청소해 주는 것으로, 그리고 내 옷이나 구두에 하나하나 참견하는 것으로 남들 앞에 내세우기 좋은 나를 자신의 입맛대로 통제하려 했다.


나의 성취는 곧 엄마 본인의 성취인 것 마냥.

지난날 내 앞길을 막아섰던 것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이, ‘언제나 내 딸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응원하고 묵묵히 뒷받침해 줬던 엄마로서 그러한 특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엄마의 일련의 행동들을 보고 겪으면서,

나는 엄마가 딸인 나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도 나를 가로막는 엄마가 미워졌다.


엄마를 미워하는 내가 미우면서도 나는 그냥 엄마를 미워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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