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J의 퇴임식

인생의 마무리

by 고장난시계

ABJ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곧바로 한 직장에 취직해 거기에서 정년을 맞이했다.

IMF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도 끄떡없었던 직장이었지만 한 해 한 해 착실히 쌓여가는 나이는 ABJ도 피해 가지 못했다.

30년 넘게 다닌 직장에서의 마지막을 기념하기 위하여 당시 회사에서는 조촐한 퇴임식을 열어 줄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영광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30년이 넘는 ABJ의 근속이 우리 가족의 유일한 밥줄이자, 나와 내 동생들이 공부를 계속하고 번듯한 밥벌이를 할 수 있었던 밑천이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의 노고 또한 인정한다.

그럼에도 마음 편히 감사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알량한 월급이 더럽고 치사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엄마와 크게 싸움을 하고 난 후 ABJ는 보통 현관문을 ‘쾅’ 닫고 집을 뛰쳐나가거나-믿기 힘들겠지만 그나마 가장 양호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식탁이며 텔레비전 등을 가리지 않고 집 안 살림을 부수거나 아니면 굉장히 높은 빈도로 식구들을 두들겨 팼다. 그중에서도 특히 엄마를 그것도 얼굴을 집중해서. 그래서 입학식이나 졸업식 또는 운동회날에 멍든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것이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월급날이 가까워 오던 때에 엄마와 큰 싸움을 하게 되면, 여기에 한 가지 패턴이 더 추가된다.

다섯 식구가 한 달을 먹고살아야 할 월급이 들어오는 통장을 아무도 모르는 다른 통장으로 바꾸거나, 또는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죄다 인출해서 어딘가에 감추거나, 아니면 엄마가 보관하던 월급통장을 빼내 어딘가에 숨긴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처자식을 두들겨 패는 아버지들이 어디 학원에서 단체로 배워오는듯 똑같이 하는 소리.

’내 돈으로 먹고사는 것들이 고마운 줄을 모르고 어디 그렇게 싸가지 없이 굴어!‘


월급 바로 다음날이 육성회비 납부 마감일이라고 해도, 월급날까지 허리띠를 졸라매느라 문자 그대로 냉장고가 텅 비어 있다고 해도, 열이 펄펄 끓어 당장 병원에 가야 하는 식구가 있다고 해도 그 어떤 것도 ABJ는 개의치 않았다. 보고도 못 본 척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몰랐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ABJ의 말마따나 그의 돈으로 먹고살아야 하는 나의 무능력한 처지가 한탄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수치스럽고 지긋지긋하게 싫었던 것은 엄마의 우는 소리에 못 이겨 ABJ에게 돈을 조르는 이야기를 할 때였다.

ABJ의 월급이 들어오지 않은 날이면 엄마는 늘 그랬다.

ABJ한테 가서 애교 좀 떨면서 돈 좀 달라고 해.'라고.


딸이란 이유로,

바로 어젯밤에 집안 식구들을 두들겨 패고, 집안 살림을 죄다 부수고,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동네가 떠나가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며 집을 뛰쳐나간 ABJ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나는 정말 구차하고 비굴하게 ABJ한테 돈을 졸라야만 했다.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그리고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월급날과 가까운 때에 부부싸움이 벌어지면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신경이 곤두섰다. 기말고사가 시작되는 바로 전 날에 부부싸움을 하는 것보다 더.


성인이 된 이후에도 경제력을 갖기 전까지, 엄마의 집요한 애원에 못 이겨 ABJ의 회사에까지 돈을 조르러 가야 했던 터라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안정적이고 확실한 밥벌이를 소원했다. ABJ의 돈 없이도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그런 밥벌이를. 그리고 엄마처럼 경제력 없는 여자의 비참한 모습이 나를 더욱 채찍질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20대를 도서관의 어느 한 책상에서 모두 흘려보낸 후에야 나는 드디어 염원하던 밥벌이를 손에 넣었다.

손에 들어온 나의 월급은,무려 나 혼자 서울에서 사람답게 먹고살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알뜰살뜰 저축도 하고 아직 집에 묶여 있는 여동생의 탈출을 도울 만큼은 되었다.


따박따박 손에 들어오는 월급을 보면서 나는 더 이상 예전만큼 ABJ가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예전에는 그저 불쌍하게만 생각했던 엄마가 어느 순간 한심해 보였다.

이런 남편을 고른 것도, 결혼 직후부터 시작된 가정폭력에도 불구하고 그런 남편과 애를 셋이나 낳은 것도,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 본인이 배 아파 낳은 만만한 딸들을 대상으로 그저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한 것도 모두 엄마의 선택이었으니까.


엄마는 나를 붙잡고 한바탕 한풀이를 하고 나면 늘 이렇게 덧붙였다.

엄마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해서, 딸인데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외삼촌들이 대학에 보내주려 했다고. 대학만 갔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외삼촌들에게 확인한 적은 없지만, 외삼촌들이 엄마를 대학에 보내려 했던 것은 사실이었을 확률이 높다. 7남매의 막내딸로서, 엄마가 고등학생이었을 무렵에는 나이차가 꽤 나는 외삼촌들과 이모들은 이미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아마 엄마 하나 정도의 대학 학비를 원조하는 것은 가능했을테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속도위반으로 ABJ와 결혼한 것은 엄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지금에 이른 것임을 잊은 듯 엄마는 늘 피해자인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런 엄마는 한심했다.


내가 경제적으로 독립한 이후, 내 여동생도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 자매의 경제적 자립은 곧 ‘ABJ 돈으로 먹고사는 것들이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ABJ가 알량한 월급으로 더 이상 우리를 휘두를 수 없다는 것도, 내가 비굴하고 구차하게 애교를 떨며 ABJ에게 돈을 조를 필요가 없다는 것도.


ABJ는 평생 동안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우리는 언제나 그 월급에만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회사에는 정년이 있고, 아이는 어른이 되고,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ABJ는 정말 몰랐나.

그래서 ABJ는 퇴임식에 우리 자매가 기꺼이 참석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ABJ 퇴임식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나는 갈 생각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자리에 나를 초대한 것도 어이가 없었다.

시기적으로 그때는, 내가 난생처음으로 머리채를 잡고 싸운 상간녀와의 떠들썩한 불륜을 거쳐 당사자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반기지 않은 엄마와 ABJ가 재결합을 한 이후였으니까.

그때의 나는 내 부모에게 이미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 여동생도 마찬가지였고.


침이 마르게 자랑해 왔던 우리 자매가 퇴임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정말 웃기게도 ABJ의 퇴임식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토록 죽고 못살던 염치없는 친척들이며 친구들은 참석했을 만한데 그저 우리 자매가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진 퇴임식이라니.

대체 무엇을 위한 퇴임식이었나.


그 꼴을 본 후 나는 늘 되새기고는 한다.

나는 영원히 젊지 않고, 평생 회사에서 따박따박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지금의 내 자리가 영원히 내 것도 아니고 나에게도 언젠가 끝이 오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끝이 어떤 모습일지는 지금의 내가 결정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늘 마지막의 내 모습을 생각하며 지금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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