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꼴

콩 심은 데는 꼭 콩만 날까?

by 고장난시계

대부분의 첫째 딸은 아버지를 닮는다. 그리고 이런 일반적인 법칙을 나 역시도 피해 가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나는 ABJ를 정말 많이 닮았다.


얼굴뿐만 아니라, 체형이며 ABJ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기마이(돈에 연연하지 않고 남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싶어 하는 마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까지도.

내가 거울을 잘 보지 않는 이유도 아마 내 얼굴에서 보이는 ABJ의 얼굴을 보기 싫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평소에 거울을 제대로 보지 않던 나는 한동안 잊고 살다가도 어쩌다 남이 찍어준 사진 속에 담긴 내 얼굴을 보고 다시금 '아, 나는 ABJ를 닮았구나'하고 아프게 깨닫고 만다.


한 때는 ABJ와 같은 성을 갖는 것도 싫어서, 가명을 짓기까지 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내 안의 반을 이루는 ABJ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ABJ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을 부정하고자 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나 역시 그와 똑같은 인간이 될까봐.


콩 심은 데는 콩이 나고, 팥 심은 데는 팥이 난다고 한다.

이 말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무슨 짓을 해도 결국 태가 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내가 부모가 된다면, 나 역시 ABJ처럼 집안 식구들을 때리고 집안 살림을 부수는 사람이 될까?

그보다 내가 누군가와 사랑을 하게 된다면, 모든 사람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될까?

나는 ABJ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물음 앞에서는 언제나 작아진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례들이 있기에.


최근 충격받은 뉴스 중의 하나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던 여자가 가정폭력의 가해자가 되었다는 얘기였다.

많고 많은 사례 중에 그 얘기에 유달리 충격받았던 이유는, 가정폭력을 저지하기 위해 정말로 고군분투했던 피해자가 결국 되물림의 고리를 끊지 못한 것에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텐데,

연쇄 성폭행범 안용민의 딸이었던 안은경은, 자신의 아버지가 교도소를 출소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새어머니마저 살해하자 직접 자신의 아버지를 강력하게 처벌해 달라며 국민청원을 올렸다. 이 과정에서 안용민은 자신의 친딸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으며 갖은 협박을 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안은경은 자신의 실명을 밝히면서까지 전 국민을 상대로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을 방관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안용민은 정말 드물게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사회와 영원히 격리되었다.

빛나는 승리 끝에 안은경은 어떻게 되었나.


놀랍게도, 분명 자신이 학대당한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을 텐데도 자신의 조카를 장기간 학대 한 끝에 사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이 죄수복을 입는 처지가 되었다.


유전자라는 것은 정말 거부할 수 없는 것일까?
가정폭력범의 딸은 가정폭력범이 될 수밖에 없고, 살인자의 딸은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나.


물론 되물림의 고리를 끊어내고 자신의 인생을 개척한 많은 사례 또한 나 역시 알고 있다.

오프라 윈프리는 오랫동안 가정폭력과 성폭력의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토크쇼 호스트로 성공했고, 빌 클린턴은 알코올 중독자였던 새아버지로부터 온갖 학대를 받았음에도 결국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이러한 인간 성공의 스토리보다, 암울한 이야기에 더욱 신경이 쓰인다.


나의 몸속에도 가정폭력범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언제 이 유전자가 발현될지, 언제 나를 조종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다.

그래서 이성과 결혼으로 발전될지도 모르는 깊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두렵고, 나보다 약한 존재들, 특히 어린 아이나 동물들을 마주할 때마다 조금 긴장된다.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해를 입히게 되면 어쩌지 하고.


ABJ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나를 억누른다.

담배는 입에도 대 본 적이 없고, 술은 일 년에 1~2번 맥주 한 캔을 먹을까 말까 하며, 그 어떠한 경우에도 먼저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

말을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기 위해 집중하고, 아무 의미 없는 사람들에게 나를 돋보이려 애쓰지 않으며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나는 정말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고 자부하지만, 그래도 두렵다.

그래서 때때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사이코패스 검사지나 소시오패스를 가려낼 수 있다는 질문들,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을 정리해 놓은 기사들을 보면서 나를 점검한다.

나도 모르게 내가 나쁜 사람이 되어 있을까 봐.


나의 이런 두려움을 아는지, 오랜만에 만난 내 여동생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보다 내가 더 ABJ를 닮았어.’라고.

내가 보기에 내 여동생은 ABJ보다 엄마를 더 닮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정하게 말해주는 마음이 고맙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얻은 귀한 딸을 선선히 내 품에 안겨주는 것도.


품 안에 가득 안긴 내 조카가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조금 풀어진다.

아마, 나는 훈육과 학대의 경계를 잘 몰라서 내 예쁜 조카를 혼내는 것은 잘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내 조카를 마음껏 예뻐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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