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9일 18시 57분 13초

by 진퇴양난
상기명 본인은 2020년 4월 9일 19시경, 이륜차를 타고 0000에서 000삼거리 방향의 4차로 도로 중 3차로에서 진행하던 중 선행차량의 정차로 인해 정차하였으나 후방의 개인택시에 의해 충격되어 제출한 진단서와 같은 부상을 입었음을 진술함 (사고 후 교통사고 조사서의 피해자 진술 내용)


미팅을 마치고 반가운 얼굴들과 식사라도 하고 싶었으나 예전부터 계획되었던 회의를 더는 미룰 수 없어 다음 회의 장소로 향했다.


“운전 조심하세요.”

“양난씨, 오토바이도 타시는구나.”

“주차가 편해서요. 코로나가 끝나면 그만 타려고요. 만보객으로 살아보려는 결심을 했거든요.”


최근 리처드 세넷의 책을 인상 깊게 읽고, 내 스승들이 모두 만보객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 역시 예전의 삶에서 만보객이었음을. 걸음의 속도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과 눈인사를 나누며 때로는 참견도 해 보고 가끔은 그들의 참견에 성가셔하면서 살았던 시절을 떠올렸다.




대학시절 나의 지도 교수였던 선생님은 나에게 발끝으로 들으라 했고, 또 다른 선생님은 만나면 늘 함께 걷기를 원했다.

나에게 카메라로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준 스승에게서는 따로 가르침을 얻기보다 그저 뒤따라 걷고 함께 사진을 찍을 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더 이상 걷지 않게 된 것이.


예전 친구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그들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35kg. 내가 예전의 삶을 그만두고 나서 지난 10년간 얻은 몸무게다.


내가 더 이상 걷지 않게 되면서 나에게는 스트리트 스마트가 아니라 지방이 축적되기 시작했다. 그런 내가 이제 걸어야겠다고 다짐한 이 시기에.


"꽝"순식간이었다.
뒤따르던 차는 무슨 연유에선지
브레이크도 밟지 않고
나를 들이받았다.

“괜찮으세요? 정말 미안합니다. 앞을 보지 못했어요”

“헬멧 써서 천만다행이다.”

“으악, 저 발 낀 거 아냐?”

퇴근길의 00에는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나는 내 발목을 바라봤다.

괴상한 모양으로 꺾인 발목과 그 예사롭지 않은 통증을 느끼는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앞으로 걸을 수 있을까' 만보객의 걸음이 아니라, 나의 자유의지로 더는 걸을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119, 112 부르시고요.
앞차 차주 분은 시동 좀 끄시고요.
제가 마후라 아래에 누워있잖아요.

누가 신고했는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119 구조대는 도착했다.

하지만 나의 요추와 경추를 보호하며 보호구를 씌워 안전히 옮길 것이라는 나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체온 좀 측정하겠습니다.
안 다친 발로 일어설게요.
혹시 대구, 경북지역에
최근 다녀오신 적이 있나요?


침대에 누워 근처 정형외과 전문 병원으로 이동하는 길에도 나에게 구급대원들은 통증이나 의식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해외여행이나 대구 경북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는지를 두어 번 더 확인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누군가가 나를 휠체어에 앉히고 접수를 하게 했다. 의학 드라마와 현실은 많이 달랐다. 사고 접수를 위해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보험회사와의 통화가 끝나자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경찰관 두 사람. 사고에 대한 몇 가지 의례적인 질문을 하고 나서 나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평소에 신분증을 잘 가지고 다니지 않는 나는 신분증이 없다는 대답을 했고 그 대답을 듣자 갑자기 경찰의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진퇴양난씨, 본인 맞습니까?”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없으면 저희가 어떻게 본인인 줄 알죠?”


아. 나이 마흔에 오토바이 사고가 이렇게 서럽구나.

이 사람들이 나를 보험사기범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내가 어제 학교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아! 제 가방에 신분증이 있을 것도 같네요.”


생전 가지고 다니지 않던 교직원증. 코로나 19로 인해 출입구가 제한되어 처음으로 목에 걸고 학교에 다녀왔던 나의 교직원증을 보자 경찰의 태도는 또다시 달라졌다.


그리고

“아니 교수님이시네, 왜 오토바이를 타셔서...”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나는 전임교수도 아니고 강사법 개정의 여파로 학교의 필요에 의해 많은 과목을 강의하기 위해 겸임교수 직함을 달고 있을 뿐이지만 그의 달라진 태도와 교수가 왜 오토바이를 타냐는 말은 나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경찰들도 오토바이 많이 타지 않나요?”

“그건 범인을 잡을 때 기동력 때문에 그런 거고, 여기 유명한 학교 아닙니까. 연예인도 많고...”

“저는 주차가 편해서요. 뭐가 잘못되었나요? 아 뭐. 위험해서 걱정해 주시는 거면 알겠습니다. 저도 이제 타지 않기로 결심했거든요.”


또다시 경찰의 태도는 달라졌다. 이번에는 무시도 경외도 아니다. 그냥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기분을 느낄 때쯤 경찰은 기초 조사는 끝났고 관할서 교통조사계에서 사고 조사를 진행할 것이며 전화가 몇 번 올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사라졌다.


아. 경례 같은 건 하지 않는구나. 나는 도대체 어느 나라 드라마를 본 거지.


*이 글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낯설게 바라본 세상을 일들을 주관적 시각으로 서술한 글입니다. 응급구조를 해 주신 소방공무원 분들, 경찰 공무원 분들, 의료진 분들 모두 자신의 임무 절차에 따라 성실히 수행해 주셨습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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