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세넷, <짓기와 거주하기-도시를 위한 윤리>
응급실에서 나보다 먼저 온 팔이 부러진 배달대행 서비스 노동자, 거실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진 노인을 기다리며 고통을 참았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내 차례인 것 같았는데 얼굴이 창백해진 한 아이가 더 창백한 얼굴을 한 내 또래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응급실로 들어왔다.
아드레날린의 영향인지 다리의 통증은 참을만했고 배가 아픈데 정형외과 전문병원의 응급실로 올 정도로 급성인 아이의 병명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며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응급실에서의 시간을 버티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 다리는 어떻게 된 것일까.
회복은 가능한 것일까.
왜 하필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바로 어제, 만보객의 삶을 살고 싶다는 굳은 마음을 먹게 된 나에게.
지난겨울, 관계와 사람들에 대해 큰 실망을 경험하게 되는 일이 생겼고 나는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신부님의 도움으로 시골에 있는 한 가톨릭 수도원에 식객으로 머무르며 내가 가진 재주로 도울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하며 지냈다.
수도원의 고요함이 익숙해지자 참을 수 없는 무료함이 찾아왔다. 평소 적독積讀도 독서의 한 방법이다. 책은 사서 읽는 것이 아니라 사 두었던 책 중에서 읽는 것이다. 등의 게으른 자들을 위한 변명을 신조로 여기며 책장에 펼쳐보지도 않은 채 쌓여있던 책들은 매주 한 상자씩 택배 상자에 실려 수도원으로 날아와 나의 무료함을 달래주었다. 수도원의 그 맛있던 포도주와 함께.
타자로부터의 도피라는
질병을 스스로 치료하기 위한
사회적 의미의 '치료약'같은 것은 없다.
(짓기와 거주하기, p.254)
그때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 하나가 리처드 세넷의 짓기와 거주하기였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만보객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도시 계획이라는 측면에서 도시를 바라보면서 지어진 도시(빌)와 그것의 거주형태(시테)가 설명하고 도시가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 실천적으로 제시한다.
이 제목은 하이데거의 소고, 짓기 거주하기 사유하기 에서 가져온 것인데 리처드 세넷은 이 단어들 사이가 문장 부호 없이 나열된 것은 이 세 개념이 하나의 경험을 형성하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스스로 만든 장소이자 사유의 공간인 집에 자리 잡아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세넷은 하이데거의 집이 사유의 공간이 아니라 도피의 공간이라고 말하며 이를 경계할 것을 주장한다.
또한 우리의 도시가 이미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음도 주지시키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도시를 위한 윤리'인 것으로 볼 때 세넷은 이 책을 통해 하이데거식의 사유가 아닌 도시의 실천학을 탐구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음을 밝히고 있는 듯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료하다. 하지만 저자가 결론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노동과 도시화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저자는 18세에 줄리아드 음악학교를 졸업할 정도로 음악의 재능을 보였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음악가의 길을 접고 학문의 길을 걸었던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글을 통해 보이는 모습 역시 전형적인 학자보다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자유로운 사상가처럼 보인다.
건축을 통한 도시 공간(빌-시테)의 이해를 제시하기 위해 저자는 스스로 ‘강박적’이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다양한 학자들을 호명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만난 사람들을 이야기의 동행으로 삼아 함께 걸어간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1부에서 도시계획의 역사에서 출발해 그 역사의 세 거인(파리의 오스만, 바르셀로나의 세르다, 센트럴 파크의 옴스테드)의 지향과 실천 그리고 그 결과를 바라보는 것으로 도시계획의 실패가 결국 시테와 빌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음을 설명한다.
2부에서는 이 시테와 빌의 균열(사는 것과 지어진 것의 균열)이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큰 이슈(팽창-파괴의 문제, 타자의 문제, 스마트 시티-자발적 게토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만보객이라는 존재는
이 곤혹스러움에서 태어났다.
어떻게든
자신을 알기 위해 도시를 걷는 것이다.
(p. 271)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3부 도시의 개방은 1부와 2부에서 제기한 문제를 전재하고 “그래서?”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장은 도시 거주자들이 시테에 관여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고 나아가 빌을 구성하는 주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먼저 도시 거주자들이 시테에 보다 잘 관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스트리트 스마트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메데인 빈민가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능력, 평소와 다른 작은 세부사항들을 읽어내고 그것에 집중 조명하고 포착하는 것을 스트리트 스마트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스트리트 스마트를 통해 우리는 체화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스트리트 스마트는 낯선 곳에 적응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낯선 곳에서의 스트리트 스마트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은 ‘걷기’이다.
도시계획을 통해 도로는 도시를 동맥과 정맥처럼 가로지르고 있다. 걷기는 이러한 도시계획의 목적에 반하는 이동수단이다. 도시를 이동시키는 것은 차도이지 보도가 아니다. 하지만 만보객의 자유로운 산책은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이 된다. 걷는 이는 주변시를 활용해 많은 정보를 습득하게 되고 단순한 거리의 이동만이 아니라 높낮이의 위상차를 경험하는 몸은 도시의 이동 공간, 지리적 정보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체득하게 된다.
책을 이쯤 읽었을 무렵 내 머릿속에는 만보객으로 살아가는(갔던) 나의 스승들이 이리저리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이 늘 말하던 “발끝으로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때 마침 손님 담당 수사님이 찾아오셔서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수도원의 외부 손님을 금지하는 결정이 났고 아쉽지만 조금 일찍 떠나 주셔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신발 끈을 묶고 집 밖으로 나가 걷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2주간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작되었다. 그 기간이 끝나고 나는 세넷이 메데인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예전에 작업을 위해 자주 찾았던 서울역 인근의 쪽방촌을 찾았다. 사실 나는 5년 전부터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고 짧은 형태로 발표했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을 모아 한 편의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기로 마음먹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끝맺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죄송한 마음과 또 섭섭한 마음들이 섞여 오랫동안 찾아가지 못했다.
오랜만에 찾아간 그곳에서 반갑게 맞아주시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그곳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면서 필연적으로 스트리트 스마트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게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한계가 지워져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 빌의 역할이자 도시의 윤리일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기괴한 모습이 불편해졌다. 나는 만보객으로서 이들의 말해지지 않은 말을 듣고 이들의 삶에 대한 작업을 마무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인 지금, 나는 병원 응급실 앞에서 다리가 고정되지 않는 고장 난 휠체어에 앉아 통증을 참고 있는 것이다.
응급실에서 나의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소리를 질러야 하나.
통증이 온몸을 가득 채우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왜 일까. 나는 어릴 때부터 잘 참는 아이였다. 아니 잘 참아야만 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여기저기 부딪히고 찢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꾸중을 듣기 일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