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샤워.

사고 7일째.

by 진퇴양난

사고가 난 후 일주일이 지나고 첫 샤워를 했다.

처음에는 그저 물 없이 감을 수 있는 샴푸만 있다는 것이 행복했는데 며칠이 지나니 몸을 씻지 못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씻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보다 못한 아내가 골절환자용으로 나온 다리 방수커버를 찾아 주문해 주었다. 신세계였다. 나는 이때부터 골절환자를 위한 다른 것들이 무엇이 있을지 검색하는 것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나니 병원에 있다는 개인 목욕실에 가보고 싶어 졌다. 주말에 아내가 병원에 왔을 때 그곳에 가서 씻어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아내는 그냥 병실에 있는 화장실에서 씻는 게 낫지 않겠느냐. 거기까지 꼭 가서 씻어야겠냐고 말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그곳에서 시원하게 앉아 씻고 있었다. 나의 표정을 본 아내는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순순히 나와 함께 그곳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욕실이 있는 층에 도착했고 엘리베이터 앞 휴게실에는 몇몇 분들이 모여 티비를 보고 계셨다. 유심히 나를 보는 그 눈빛을 무시하며 욕실에 도착했고 솔직히 처음에는 살짝 실망스러웠다. 병실 화장실 보다 그리 넓지도 않았고 그냥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라스틱 간이 의자만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한쪽 다리로 서서 세면대를 잡고 서서 샤워를 하는 신세라는 것을 깨닫고 어서 빨리 앉아서 씻을 기대에 부풀었다.


아. 속옷 안 가지고 왔다. 씻고 있어. 병실에 다녀올게. 아내는 의자에 앉아 더운물을 맞으며 흡족하게 웃고 있는 나를 보며 병실에 다녀온다고 했고 나는 대답도 않고 고개만 끄덕이며 여유를 만끽했다.


더운물을 맞고 있자니 시원하게 머리를 감고 싶었다. 아내가 두고 간 샴푸가 거의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있었다. 손을 뻗으니 살짝 닿지 않았고 나는 몸을 기울여 샴푸를 잡기 위해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플라스틱 의자의 다리가 미끄러지며 꺾였고 이내 부러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다친 다리를 부딪히지 않으려 반대쪽으로 넘어졌고 반대쪽 무릎으로 떨어졌다. 얼마나 큰 소리가 났던지 휴게실에 모여 계시던 분들이 욕실로 뛰어왔고 그중 한 분이 괜찮냐는 말과 함께 들어오셨다. 나는 전라의 상태로 바닥에 엎드린 채로 그분과 눈이 마주쳤다. 아. 물리치료실 앞에서 내가 소리를 질렀던 그분이구나. 어쨌거나 그분의 도움으로 나는 일어날 수 있었고 이내 아내가 올라와 상황은 정리되었다.


참담했다. 뭐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냥 모든 게 참담했다. 고작 며칠 전에 오지랖에 분노하며 화를 냈던 분의 도움으로 겨우 일어난 것이 분했던 것도, 내 무거운 몸을 버티지 못한 의자 때문에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 허술한 의자를 욕실에 가져다 놓은 병원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분했고 화가 났다.

또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내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사실 아내는 마음이 굉장히 여린 사람인데 이번 사고 이후에 단 한 번도 나에게 당황하는 모습을 모이지 않고 모든 것을 해결하고 수습하며 나를 보살펴 왔다. 그런 아내 앞에서 내가 눈물을 흘리면 안될 것만 같았다.


우선 또다시 검색을 해 병실 화장실에서도 앉아서 샤워를 할 수 있는 환자용 목욕의자를 찾았다. 검색에 검색을 거듭 해 나의 몸무게를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모델로 주문했다. 나는 살이 찌고 나서부터 의자를 검색할 때면 최대 지지하중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사실 이 습관이 생긴 것은 몇 해 전 전주영화제 이후였다. 그날도 모든 상영이 끝나고 난 뒤 한 유명한 막걸리 집에서 뒤풀이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왔고 나 역시 오랜만에 혹은 얼굴은 알고 있었으나 인사를 나눈 적은 없는 사람들과 통성명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제가 한 잔 드릴게요. 건너편에 앉게 된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 분과 인사를 나누며 잔을 부딪히던 중 갑자기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막걸리 집의 플라스틱 의자가 산산조각이 났고 나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실 이 의자가 내가 처음 앉을 때부터 살짝 상태가 안 좋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까지 산산조각이 날 줄이야. 가게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술이 많이 취한 것도 아니고 의자가 원래 상태가 안 좋았던 것이지만 그곳의 모든 사람이 내가 술이 취해 고꾸라졌거나, 몸이 무거워 의자를 부쉈다고 생각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이후 한동안 영화제 뒤풀이 자리에서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인사를 하면 나는 내가 의자를 부숴서 기억을 하는 것만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쨌든 의자를 주문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병실로 보내 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욕실이 있던 층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예의 그 빌런님이 계셨다. 과일을 건네며 아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지난번에 무례했었는데 사과드리지 못해 죄송했다고 늦은 인사를 했다. 핵인싸 빌런님은 호쾌하게 웃으며 젊은 사람이 사고 나서 병원에 있으면 답답하기 마련이라며 괜찮다고 다친 데는 없냐고 걱정해 주셨다. 역시 이 병원에서 가장 악독한 빌런은 나였다.




오늘의 교훈.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

그리고 다리 골절환자 필수 아이템.

다리 방수 커버. 환자용 목욕 의자.

(검색하면 다 나옴)

keyword
작가의 이전글물리치료실의 빌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