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치료실의 빌런들.

물론 그 빌런에는 나도 포함.

by 진퇴양난

병원에 있으면서 비대면 수업 이외에 내가 해야 할 일과는 거의 없다. 하지만 내가 빼먹지 않으려고 하는 유일한 일과가 바로 물리치료다. 입원환자들은 오전, 오후 한 번씩 물리치료를 받을 수 있다. 부러진 나의 발목은 아직 물리치료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만 사고 이후, 목과 허리, 등에 통증이 생겼고 왼쪽 허벅지에 묵직한 저림이 생긴 나에게 이 물리치료 시간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일과이다.


물리치료실에는 입원환자뿐 아니라 외래환자들도 많이 오는데 원래 입원환자들이 물리치료를 하는 시간으로 배정된 시간이 외래환자들이 뜸해지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오전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기 전에 빨리 다녀오면 안 될까? 하는 마음으로 물리치료실에 가 본 후였다. 그 시간의 그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이후 이 병원에 시스템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며 새삼스레 원장님이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실 이 병원으로 옮겨 온 것은 조용한 병실을 찾아서였지만 처음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부터 이 선생님이 마음에 들었다. 그 이유는 진료실 책상에서 고개를 돌리면 손이 닿을 만한 곳에 내가 공부를 배우고 있는 철학 선생님의 저서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호감에서 시작되었지만 볼수록 이 정형외과 의원의 시스템은 체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군 병원에서 행정병으로 군생활을 했던지라 병원이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수술방까지 담당하는 능력 있는 수간호사 선생님과 무뚝뚝하지만 환자에게 필요한 정보는 꼭 전달하고 세세하게 챙기는 의사 선생님의 콤비플레이 그리고 야간 간호사 선생님과 주말 당직 간호사 선생님의 성실함까지. 무언가 굉장히 잘 관리되고 있다는 감탄을 하게 하는 조합이었다. 여기에 친절함과 함께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막내 남자 간호사 선생님이 빠질 수 없다.


어쨌든 나에게 하루 두 번의 휴식을 주는 물리치료실에서 가끔 빌런들을 만나곤 했다.

우선 첫 번째 유형의 빌런은 물리치료를 하는 동안 쉬지 않고 큰 목소리로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정형외과 병원이다 보니 이런저런 사고 후유증으로 치료받는 분들이 많은데 보험회사와 큰 소리로 싸우는 사람, 내가 입원해 있는데 왜 한번 찾아오지도 않느냐며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는 사람, 여기 병원이니까 나중에 전화하자는 말을 반복하면서 끊을 듯 끊을 듯 끊어지지 않는 통화를 이어가는 사람 등이 있었다.


물리 치료실에 누워 있다 보면 이 통화에 집중하게 되는데 한 번은 어떤 분이 열띤 목소리로 막 소리를 치다가 전화가 끊어진 것을 늦게 알았는지 '아이 씨 끊어졌네'라고 중얼거렸는데 그 순간 가려진 커튼 너머로 몇 명의 사람들이 웃음을 참는 다급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음. 나만 집중하는 게 아니었어. 왜 사람들은 물리치료를 받는 이 짧은 시간 동안에도 전화를 받아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던 찰나, 나에게도 전화가 걸려왔다.

02-XXX-OOOO

아 학교다. 나는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나의 사고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학과장님의 전화였다. 인사는 각도보다 속도라는 말을 누가 하는 것을 듣고 아 저 사람은 삶의 통찰을 얻었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방금까지 사람들이 왜 전화를 받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할 새도 없이 통화 아이콘을 누르고 있었다.

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누워서 전화를 받으면서도 고개는 자동으로 숙여졌다. 병문안을 오시겠다는 말씀에 순간적으로 요즘 코로나 때문에 병문안이 안됩니다 선생님. 하고 거짓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이 병원에서 출입할 때 체온을 재기는 하지만 병문안을 막고 있지는 않은데. 커튼 바깥에서 비웃음이 넘어오는 것 같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사람들의 전화통화를 매너 없음이라고 여기며 비웃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각자 자신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몸이 아파 일을 나가지 못하고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 어떤 전화가 오더라도 내가 치료 중이니 받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 다른 유형의 빌런은 타인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갖는 경우이다. 내 경우에는 이 타입이 가장 불편했다. 이분들은 인싸라 할 수 있는데, 치료실에 들어오면서부터 모든 치료사 선생님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것으로 이목을 아니 이를 집중시킨다. 커튼을 치고 누워있기에 그분들과 마주칠 일은 없지만 물리치료실에 가끔 사람이 많아 기다리거나 병실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꼭 그런 빌런을 만나곤 했다.


왜 다쳤냐, 교통사고라고, 교통사고인데 어떻게 발목을 다쳤냐로 시작해 나이 먹고 오토바이를 왜 타냐, 오토바이를 예전에는 과부 틀이라고 불렀다, 발목 재활하려면 살 빼야 할 거다 등 신기하게도 이 유형의 빌런은 사람이 바뀌어도 레퍼토리는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꼭 물어보지도 않고 친절히 내 휠체어를 밀며 접근하곤 했다.


사실 교통사고 이후로 뒤에서 누가 다가 오기만 해도 깜짝 놀라는 증상이 있었는데 한 번은 내 휠체어를 뒤에서 갑자기 누가 밀길래, 아 괜찮습니다.라고 말했지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갑자기 내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아 괜찮다고 좀.이라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분은 다른 층에 있는 입원실에 계시는 분이셨는데 나는 사과할 타이밍을 놓쳤고 엘리베이터는 내가 입원해 있는 층에 도착했다. 그때는 몰랐지. 이분을 그렇게 어색하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아. 물리치료실에서 만난 빌런, 아니 진상들에 대해 재미있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그곳에서 내가 제일 진상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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