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량이 많기로 유명한, 그만큼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에 다닌 적이 있습니다. "3일쯤 밤새야 일 좀 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오가던 곳이었죠.
어느 날, 퇴근 시간 무렵이었습니다. 한 영업 대표가 우리 팀 리더를 찾아왔습니다.
“좀 급한 제안서가 있습니다.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 제출인가요?”
“죄송한데... 내일 아침 9시입니다.”
이런 일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팀 리더는 저와 눈에 띄는 몇 명을 불러 세웠고, 우리는 영업과 간단히 내용을 공유한 뒤 곧바로 작성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급조된 제안팀의 막내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저... 잠깐 집에 다녀와도 될까요?”
“왜? 지금 급한데?”
“내일 지방 출장이 있어서요. 양복을 챙겨야 합니다. 11시까지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밤을 새워 제안서를 쓰고, 곧바로 출장지로 떠날 예정이었습니다.
이처럼, 일이 많으면 이상한 풍경이 일상이 됩니다.
어느 날은 오전 제안 회의 도중, 사장님이 전 직원에게 '올 스톱'을 명령하셨습니다.
“이 제안, 너무 중요합니다. 모든 직원은 하던 일 멈추고 이 제안부터 대응하세요.”
그런데 오후에 또 다른 제안 회의가 열렸고, 사장님은 다시 외치셨습니다.
“그 어떤 제안보다 이게 더 중요합니다. 모두 이 제안에 집중하세요!”
그래서 저를 포함한 제안팀은 5일 동안 제안서에 매달렸습니다. 당연히 집에 가지도 잠을 자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창의적인 제안서 2,000페이지’를 완성한 후, 마지막 리뷰 중에 저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었죠.
그 시절 우리는, 정보통신 시대를 여는 산업화의 일꾼이었습니다.
얼마 전, 링크드인에서 아는 분과 주말에 톡을 나눴습니다.
“주말인데 벚꽃놀이 안 하고 뭐 하세요?”
“제안서 쓰고 있습니다.”
“헐...”
“그래도 오늘 비 와서 덜 억울하네요.”
아직도 제안서 때문에 산업 역군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놈의 제안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