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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Feb 06. 2021

제2의 언어, 리터러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아직도 신문 보는 사람이 있네.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식탁에 놓인 신문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붙이기를.

-지난번에도 내가 이렇게 말했더니 신문 팔러 온 이가 옛날 일들은 다 파피루스로 전해졌다 하더라.


신문 보는 이가 드문 세상이긴 하다.

오죽하면 맘 카페에 신문지 구한다는 글까지 올라올까. 학교 준비물로 필요하다나.


그런데 나는 아직 신문을 다. 신문 값은 몇 년 전에 15000 원으로 인상되었는데, 한 부 값을 내면 두 부를 넣어준다. 가격이 오른 게 맞는지 셈법이 이상하다. 집에 들어오는 신문 두 부를 매일 빠트리지 않고 읽는데, 바빠서 못 읽은 날에는 자기 전에 대충 훑어보기도 한다.


1 면 헤드라인과 내용을 건성으로 읽고, 다음 사회 면은 건너뛴다. -이건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미 알기 때문이다 -국제, 문화, 교육, 오피니언 면을 꼼꼼하게 본다. 사설은 거의 읽지 않는다. 토요일 신문의 책 리뷰를 즐겁게 기다린다. 두 신문의 리뷰를 비교해가며 읽으면 상당히 재미있다. 비중 있게 다룬 책이 다른 쪽 신문에선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커피를 마시며 한 주간 쏟아져 나온 책들을 구경하는 건 나의 최애 취미다.


지난 1월, 집에 내려온 손자들은 유튜브에 빠져 있었다. 6개월 전 여름에여자아이의 먹방이 인기였다.

-그냥 자장면 먹고, 라면 먹고 아무것도 아닌데 애들이 그걸 종일 보려 해.

딸의 말에 궁금해서 손자들 옆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봤다.


딸꾹딸꾹. 딸꾹질을 하던 일곱 살 손자가 식탁에 와서 물을 천천히 세 모금 마시더니 “유튜브에서 시킨 대로 하니 딸꾹질이 멎네.” 하고 돌아서 간다. 작은 녀석은 오므라이스 위 케첩을 혀로 빨아먹더니 “꿀잼 꿀잼” 한다. 걱정이 많아진 나는 책을 읽어주고 싶은데 녀석들은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재미를 맛보기에 책은 너무 더딘가 보다. 아이들에겐 순식간에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 너무 많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성찰과 소통으로 연대하는 사회를 만들려는 리터러시 연구가 김성우와 엄기호의 대담집이다.


아이가 길가에서 붉은 열매를 줍는다. 이게 뭐냐고 묻자 엄마는 우리 함께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자고 말한다. 도사관 사서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런 열매의 이름을 어떻게 찾을 수 있냐고. 사서 주위에서 책을 읽던 이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하다가 흩어져서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기 시작한다. 마침내 식물도감에서 열매의 이름을 찾는다.


문자가 없는 시대가 있었다. 문자가 생기고, 인쇄술의 발달로 책이 만들어지며 문화가 급속히 발달했다. 그리고 이젠 소셜 미디어까지. 지루하고 밋밋해 보이는 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버틸 수 있을까?


문자가 없는 시대에는 공동체의 지식이 있었다. 지혜로운 노인, 권위 있는 어른이 문자의 역할을 했다. 문자가 나오며 기억에 의거한 역사가 생겼다. 선인先人의 글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점검할 수 있게 되었다. 소셜 미디어가 없었을 때는 뛰어난 지식인도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없어 자신의 생각에 한 조각 의심을 가졌다.

소셜 미디어가 생기면서 우리는 자기 취향에 맞는 미디어를 선택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미디어는 개인의 취향에 맞는 내용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서 같은 걸 본다. 이걸 ‘증폭 효과’라 한다. 좁은 욕실에서 노래하면 울려서 크게 들린다. 차츰 자신의 생각이 모두 옳다고 여기게 된다. 회의하고 의심하는 기능이 사라진다.




책을 읽다가 집중력이 떨어지면 나는 다른 책을 펼친다. 그러다 보니 어떨 때는 두세 권을 나란히 시옷자로 엎어놓고 읽기도 한다. 책을 고이 다루는 이도 있는데, 나는 책은 낡고 너덜너덜해져야 자기의 소임을 다하는 거라고 편하게 생각한다. 책에 나의 흔적을 남긴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침 신문의 칼럼에서 영화 <더 포스트 The Post)>를 소개했는데, 신기하게 그날 오후에 같은 영화를 소재로 한 글을 읽었다. 성향이 달라 보이는 신문과 책의 저자가 손으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면 진실은 어느 한 편에 속한 게 아닌가 보다.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들』은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한 최대환 신부가 문학, 철학, 음악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성찰 탐구한 산문집이다. '진실은 시간의 딸'이라는 서양 격언에서 글의 제목을 따왔다. 진실의 시간. 더 포스트를 언론의 자유와 여성의 평등한 권리에 대한 영화로 소개한다.


베트남 전이 한창이던 미국, 닉슨 정부 시대가 배경이다. 케네디 정권의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국방 정책 보고서를 썼다. 이 자료는 지난 대통령들의 국방 정책 오류를 보고한다. 문서가 유출된다. 뉴욕 타임스가 특종으로 기사를 내자 정부는 신문사를 상대로 법정 소송을 한다. 워싱턴 포스트 지 기자도 이 자료를 입수한다.


기사를 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루만 지나면 뉴욕 타임스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다. 온건하게 하루를 기다려서 싣자는 파와 국민에게 바로 알리는 게 언론의 본분이라는 파. 신문사 사주, 이사, 편집국장, 은행가, 변호사가 한밤에 치열한 논쟁을 벌인다.


영화 말미에 워싱터 포스트 지의 사주인 캐서린 그레이엄과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가 주고받는 말들이 인상적이다.


"언론은 통치자가 아닌 국민을 섬겨야 한다."

"뉴스는 역사의 초고다."

"우리가 항상 옳을 수는 없고 완벽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계속 써나가는 거죠."




신문 칼럼과 책에서 읽은 글이 영화를 보게 했고, 언론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며 우리의 언론을 돌아보게 다. 일종의 리터러시(literacy)다. ‘읽기’가 ‘보기’로 연결되고, 앎, 지식이 삶에 영향을 미쳤다. 리터러시는 문자와 다양한 영상을 통해 정보를 찾아내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만들어내고, 소통하는 능력이다. 이런 리터러시의 환경에 우리는 얼마나 노출되어 있을까?


나는 비교적 리터러시의 여건이 풍족한 편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어떠한가. 이런 환경을 접하지 못하는 이들은 어떻게 리터러시를 맛볼 것인가. ‘아는 놈들이 더 하다’는 말처럼. 혹시 소수의 지식인들이 리터러시를 사유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언제나 천국을 일종의 도서관으로 상상해 왔다."

아이러니하게 그는 눈이 멀고서야 꿈에 그리던 도서관의 관장이 되었다.


전국 어디나, 살고 있는 집에서 걸어서 십 분 거리 내 도서관을 갖는 것. 나는 늘 이걸 주장한다. 나라 전체가 이런 분위기로 나아갔으면. 어린이나 노인, 책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손쉽게 책을 접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입시 공정성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배움의 공정성이다. 공공성의 핵심은 바로 이 무차별성이다 배움의 공공성 실현을 위한 핵심적 실천을 보여 주는 것이 도서관이다.


저자는 가장 쉽게 리터러시의 지표를 올릴 수 있는 게 도서관 확충이라 한다.


리터러시의 지표가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학생들이 몇 점을 받았냐, 이것이면 안 돼요.
더 중요한 건 집에 리터러시와 관련한 환경이 갖추어져 있는가, 가족 간의 대화를 통해 생각을 펼쳐 낼 기회를 갖는가.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동네 도서관이 있는가. 도서관에 가면 내가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줄 사서가 있는가. 나는 사서 선생님과 친해서 말을 나눠 볼 수 있는가, 또 내가  나는 소셜미디어를 한다면 거기서 책을 읽는 사람이나 책에 대해 얘기를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가, 읽고 쓰기와 숙고하기가 일상이 얼마나 녹아 있는가, 의미 있는 리터러시 활동에 쓸 수 있는 예산은 어느 정도인가 등이에요. 이런 것들이 리터러시에서 훨씬 중요한 지표인데 점수만 보는 거죠.



수년간 영어를 공부하고도 미국인을 만나면 간단한 대화도 힘든 게 우리 세대였다. 요즘은 영어 공부 환경이 훨씬 좋아졌다. 리터러시의 한 예라  수 있겠다.


책의 화두로 돌아가 보자.

그러면 과연 앞으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나는 좋은 책을 읽으면 내용이 눈에 어른거려 영상으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영화를 찾아보게 된다. 영화의 원작이 궁금해 책을 수소문해 읽기도 한다. 영화와 책은 비교보다는 서로 보완하 기능이다.

책과 소셜미디어도 마찬가지다. 내 취향으로 고른 소셜미디어가 나의 사고를 편향되고 획일화시키지만, 책이 수반되면 운동장이 기울어지는 걸 막아준다. 그러니 이 둘은 함께 가야 한다. 그러면 상당히 좋은 리터러시 효과를 볼 수 있다.


저자는 문자와 영상 매체의 활용 능력을 포괄적으로 '리터러시'로 사용한다. 그러니 유튜브가 책을 집어삼키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생각은 거스를 수 없는 변화에 적응하려는 긍정심이며, 희망이기도 하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김성우 × 엄기호, 따비

#<더 포스트(The Post)> 메릴 스트립 주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2017)

#『당신이 내게 말하려 했던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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