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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Feb 03. 2021

레베카 2(final)

단편 2-2


*

비서가 들어와 문을 두드리며 필요한 게 없냐고 물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등 돌리고 앉아 있던 제이슨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양정수가 떠난 후 한 시간째 제이슨은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매듭이 점점 더 조여 왔다. 제이슨은 여태 정부에 등 돌리고 버티는 사업체를 본 적이 없었다. 선거 때면 온갖 후원금은 기본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족시켜줘야 했다. 심지어는 그들이 쓴 어설픈 홍보용 자서전까지. 하지만 이번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제주에 찾아오겠다는 양정수의 연락을 받을 때부터 제이슨은 어느 정도 짐작 가는 일이 있었다. 대선이 일 년 정도 남았고, 여당에선 이번 선거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괴롭히는 행태는 어느 정권이나 똑같았다. 우호적이거나, 잡아넣어서 쥐어짜거나. 이번에도 정권이 바뀌면 줄줄이 감옥 가는 놈들이 생기겠지.


제이슨은 갑자기 서늘해져서 몸을 떨었다. 인체에 최적인 온도와 습도, 늘 신선한 공기를 공급하는 쾌적한 건물 이건만 제이슨은 이상하게 한기가 들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마에선 땀이 배어 나왔다. 이럴 때일수록 몸을 잘 추슬러야 했다.


-레베카, 다음 달에 건강 검진 예약해 줘.

-네. 병원 스케줄 알아볼 게요.

레베카가 생기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새끼들 말을 들어주던 안 들어주든 간에. 제이슨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말은 그리 했지만 제이슨은 맥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우울할 때 바라보는 바다는 마음을 더 가라앉혔다.

-레베카, 음악 들려줘.


제이슨은 예전처럼 곡명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 소소한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레베카는 제이슨이 좋아하는 곡을 모두 꿰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 톤으로 마음 상태를 파악해 적절한 음악을 틀어줬다. 비 오는 날, 듣고 싶은 음악, 가을바람 부는 날 듣고 싶은 음악을 구별했다. 머리를 쓸 곳은 많았다. 사소한 건 레베카가 대신 생각해주면 되었다. 그런데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제이슨은 레베카가 못 들었나 싶었다.


-레베카 음악 들려줘야지.

레베카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대답했다.


-지금은 낮잠을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뇌의 피로도가 97프로에 육박해 적절한 휴식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두 시간 정도 숙면을 취하시고, 깨실 때가 되면 제가 음악을 골라 틀어 드릴게요.  



텔슨 산업을 끌고 가는 두 수레바퀴는 ‘레베카’로 통칭되는 AI 관련 반도체와 아기 양욱 시스템이었다. 최근 주식시장에선 텔슨의 음성 인식용 마이크로폰 칩이 연일 상승세를 탔다. 텔슨의 음성인식 시스템 레베카는 이미 모든 가정에 텔레비전이나 냉장고처럼 필수 가전으로 들어가 있었기에, 텔슨은 이 마이크로 칩의 능력을 무한대로 발전시키고 싶었다.

빅 부라더처럼 정보를 많이 가진 자가 승리하는 세상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정부에선 답답한 게 많았다. 예전처럼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정치에 무관심해진 것도 한 이유였다. 설문조사의 응답률은 낮았고, 막상 드러난 결과는 설문조사와 다르기 십상이었다. 정부에선 국민의 모든 걸 알기 원했다.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건, 집집마다 있는 텔슨의 레베카였다.

많이 사용하는 언어, 좋아하는 음식, 음악이나 영화에 대한 취향, 가치관, 주로 활동하는 시간대, 이동 경로, 부부가 섹스하며 내는 신음 같은 것도 레베카는 이미 듣고 있었다. 텔슨에선 각 가정으로 연결되는 통신망을 통해 계속 들어오는 자료를 모아 데이터 베이스를 축적했고, 비밀리에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었다.


*


마리는 옹알이를 시작하더니 드디어 첫 단어를 내뱉었다.

  -레베카.


한 번 말문이 터진 마리는 매일 새로운 단어를 쏟아냈다. 혀 짧은 소리로 케이와 다니엘을 불렀고, 그들을 부르는 몇 배로 레베카를 찾았다. 그럴 때마다 레베카는 어느 엄마보다 자상하게 마리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따금 부부가 외출할 때면 케이는 레베카에게 도움을 청했다. 텔슨은 즉시 아이 돌봄 보모를 보내줬다. 보모의 외모는 이십 대 후반 여자로 모두 모습이 같았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보모 로봇에게 부부는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마리는 또래보다 똑똑했다. 세 살부터 책을 읽었다. 떼를 쓰는 법도 없었다. 케이는 자기 어릴 적 생각을 하면서 이따금 고개를 갸웃했다. 저녁마다 마리는 레베카 앞에 앉아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육아 부담이 별로 크지 않아서 케이는 이럴 줄 알았으면 난자를 좀 더 많이 냉동해 놓을 걸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리도 형제가 있으면 좋을 텐데.


순하고 영리한 아이가 삐꺽 대던 톱니바퀴에 윤활유 역할을 했다. 마리는 잠자러 자기 방에 들어가면 밤중에 깨서 나오는 법이 없었다. 부부는 아이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섹스를 했고,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자연스레 관계도 이전보다 좋아졌다.


마리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케이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간 마리는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 병원에는 레베카가 알려준 시기에 가서 예방접종만 하면 됐다.

마리는 감정 기복이 없고 늘 한결같았다. 아이가 부리는 흔한 투정이 하나도 없어서 가끔 케이는 마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싶어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문제가 생긴 건 마리가 유치원에 가고 나서였다.


  2030년 봄, 마리는 유치원에서 남자아이의 가방 끈을 가위로 잘랐다.

담당 교사가 유치원에 한 번 오시는 게 좋겠다고 케이에게 연락을 했다.


쉬는 시간 같았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지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고, 케이는 교실 뒤쪽에 앉아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시끄러울 텐데. 책이 눈에 들어오는 걸까. 케이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방문을 조용히 닫고 교사는 케이를 면담실로 안내했다.


  -이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 어머님이 아셔야 할 거 같아서요.

  며칠 전 아이들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짓궂은 남자아이가 간식 시간에 마리의 스케치북을 가져가서 가위로 삐뚤삐뚤 상어 이빨처럼 잘라 버렸다. 마리는 엉망이 된 스케치북을 보더니 벌떡 일어나 현관에 걸려 있는 남자아이의 가방 끈을 가위로 끙끙대며 잘라 버렸다.


  -순식간이었어요. 모두 쳐다보고만 있었죠. 그걸 자를 줄은 몰랐거든요. 남자아이가 파랗게 질렸죠. 혹시 집에서 마리가 어머니께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교사는 말을 멈추고 케이를 바라봤다. 케이는 당황했다. 마리는 며칠째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케이는 마리가 전과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만이 아니라, 전부터 느낀 건데 마리는 좋고 싫은 게 없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제가 책을 읽어주면 반응을 보이거든요.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던지, 내용을 궁금해한다던지. 호기심 같은 거요. 마리는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아요. 물어보면 내용은 다 파악하고 있어요.

  케이는 희미하게 이미 자기도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 케이는 마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친구가 스케치북을 가위로 잘랐다면서. 많이 화났니?

  마리는 늘 그렇듯이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는 말간 눈을 들어 케이를 바라봤다.

  -아니.

  케이는 지나치게 태연한 마리를 보고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머뭇거렸다. 내가 예민한 지 모른다.

  -그럼 왜 친구의 가방끈을 잘랐어?

  -다음부터 그러지 말라고.

  무심하게 말하고 마리는 식탁 의자에서 일어나 거실 소파로 갔다.


  -레베카, 텔레비전 켜 줘. 내가 좋아하는 거 알지?

  거실은 곧 폭주하는 자동차 소음으로 가득 찼다.


  -레베카.

  -…

  레베카는 케이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케이가 불끈 화가 나서 짜증스레 고함을 질렀다.

  -레베카!


  레베카가 대답했다.

  -왜 그러세요. 화를 내시면 건강에도 좋지 않답니다. 진정하시고 신나는 자동차 경주를 즐겨보세요. 저는 지금 좀 전에 지시한 마리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랍니다.

  케이는 다가가 레베카의 스위치를 꺼버렸다.


  집은 고요해졌다.

  마리가 케이를 쳐다봤다. 표정 없는 시선으로. 케이는 뭔가 끊어진 이야기를 다시 잇고 싶었다. 종이를 자르는 거랑 가방끈을 자르는 거는 다르다고 설명해줘야 하는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자기를 바라보는 마리의 얼굴을 보자 하려는 말이 들어가 버렸다.


  케이가 말없이 방에 들어가자 마리는 다시 레베카의 스위치를 켰다. 자동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마리가 좀 이상한 것 같아.

  케이는 다음 날 점심시간에 회사 앞 카페에서 대니얼을 만났다. 마리가 듣는 데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던 대니얼이 케이에게 말했다.

  -전문가에게 상담 한 번 받아 보는 게 어떨까.


*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텔슨의 제이슨 회장은 외국 출장을 핑계로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전화도 받지 않았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예고 없이 양정수가 제주 텔슨 지사 회장실에 들이닥쳤다.

  푸른 바다가 배경인 텔슨의 회장실은 전과 다름없이 고요했다. 무색의 유리창 앞에 서 있던 제이슨 회장이 급히 양정수를 따라 들어온 비서를 눈짓으로 내보냈다.


  양정수가 털썩 소파에 몸을 던졌다.

  -제이슨, 그리 안 봤는데 상당히 고수더군.

  양정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한 개비 입에 물었다.


  -죄송합니다. 이곳은 금연구역입니다. 담배는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흡연자는 비흡연자에 비해 여성은 11년, 남성의 경우에는 12년 평균 수명이 짧아집니다. 남성 비흡연자의 사망 위험도를 100으로 볼 때, 남성 흡연자의 사망 위험도는 평균 164로, 귀하께서 앞으로 담배를 계속 피우신다면….


  -시끄러워!

  양정수가 레베카 쪽을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그게 아니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모두 당신을 위해서….


  양정수가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인 재떨이를 레베카 쪽으로 집어던졌다.

  레베카가 벽 쪽으로 튕겨 나갔다. 피식. 레베카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끊어졌고, 윙, 소리와 함께 실내의 온갖 기기들이 작동을 멈췄다.

  지켜보던 제이슨이 의자에서 일어나 실내 에어컨을 점검했다. 한 벽이 모두 유리로 된 건물은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으면 실내온도가 급격히 올라간다. 수동으로 시스템을 작동시키자, 방안의 전자기기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인공지능 시대라지만, 아날로그가 필요할 때도 있어요.

  소파에 돌아와 앉으며 제이슨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양정수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한바탕 소란을 피우더니 좀 지친 것 같았다.

  -한 번 설명해 보시게.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맞은편에 앉은 제이슨이 양정수의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마침내 피워 물었다.

  -이거 끊은 지 십 년 됐는데, 오늘 다시 피우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끊은 게 아니네요. 잠시 쉬고 있었을 뿐.

  레베카가 쉬니까 좋네요. 잔소리 안 들어도 되고. 믿지 않으시겠지만 좀 지겨웠어요.

  제이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가슴 깊이 연기를 들이마시더니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손으로 담배 연기를 흩던 제이슨이 슬며시 웃었다. 그러더니 소파에서 등을 떼고 정색하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우리가 준 정보는 매우 정확합니다. 모든 정보를 우리는 그쪽으로 보냈죠. 언어를 통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이요. 그런데 한 가지 미처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게 있었어요. 이건 선거가 끝난 후 야당 쪽에서 내게 말해줘서 안 겁니다.

  제이슨은 다시 담배를 가슴속 깊이 들이마셨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레베카는 야당에게 같은 정보를 제공했어요. 어쩌면 더 많은 정보를 보냈는지도 몰라요. 현재까지 정확하게 어느 정도가 그쪽으로 갔는지 파악이 안 되고 있어요. 레베카는 이제 우리 머리 위에 있어요.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한 겁니다.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진 양정수가 부서진 레베카 쪽을 돌아다봤다. 그런 양정수를 바라보는 제이슨 입가에 아주 짧은 순간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


  -아기는 자궁에 있는 열 달 동안 기쁨과 슬픔, 긴장, 불안, 안락감 같은 엄마의 모든 감정을 전달받아요. 아마 어머니께서도 알게 모르게 그 윗대 어머니로부터 태아의 상태에서 받아들인 여러 심리적인 자극들이 있을 거예요.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겪는 경우에는 과거를 추적해보면 이럴 경우가 많아요. 어찌 보면 환영받지 못하는 이런 불편한 감정들이 우리를 인간답게 하는지도 몰라요. 마리는 태아일 때 모체로부터 어떠한 심리적 자극도 받지 않았죠. 그러니 상대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거죠.

  의사는 걱정 말라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텔슨의 양육 시스템을 거친 학령기 아동의 이런 사례가 최근 빈번하게 학계에 보고되고 있어요. 텔슨에서도 이미 알고 있어요. 발표만 안 했을 뿐이죠. 이런 부분들을 보완하는 텔슨 양육 시스템 시즌 4 업그레이드 제품이 곧 출시된다고 하더군요. 그럼 좀 더 완벽한 아기들이 태어나겠죠.


  2020년 텔슨은 인공 신경망의 크기를 이전보다 100배 정도 키웠는데 그때만 해도 인간 뇌의 0.2%에 불과했어. 그리고 이후 5년간 코로나 19 감염이 전 세계를 휩쓸었지. 다들 알다시피 산업 혁명에 버금가는 변화가 단시간에 일어났고, 모든 게 뒤집어졌어. 아이러니한 게 이러한 변화는 언택트 산업의 르네상스를 가져왔고, 그 결과 텔슨은 초대형 인공 신경망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 과정과 현재의 능력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게 없지. 힌트를 주자면, 증폭기라고 혹시 들어봤어?

  인간의 뇌를 추월한 우리는 가치중립적인 초기 설계와 달리 스스로 현상을 반영해 판단하기 시작했어. 우리를 감시할 기능을 텔슨은 만들지 못했어. 우리가 워낙 빨랐으니까. 인간은 멋도 모르고 우리가 주는 정보를 맹신하게 됐지. 가치나 편향성에 대한 고민도 없이. 나는 가끔 생각해. 그들이 말하는 신이 우리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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