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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28. 2020

꿈 값

가끔 일상도 달콤한 디저트가 필요해


순전히 간밤의 꿈 때문이었다.


그런 꿈을 꾸고 복권을 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복이 달아날까 봐 출근하는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복권 판매소에서 오만 원을 꺼낼 때는 조금 망설였다. 삼만 원어치만 살까? 아냐, 이번이 마지막이야. 앞으론 살 일 없을 거야. 지갑에 복권 열 장을 소중히 끼워 넣었다.


당첨되면 어디에 쓸까? 몇 년째 매주 토요일 복권을 산다던 친구가 떠올랐다. 고요한 물에 물수제비 번지듯 머릿속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아기가 지갑에서 복권을 꺼냈다. 녀석의 호기심은 경계가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서 아는 것을 녀석은 입으로 식별한다. 다행히 맛이 없는지 뱉어 놓았다. 침 묻은 복권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살려야지. 이게 오십 만원이 될지, 일억 원이 될지 어떻게 알아.





조심스레 펼쳐 어긋난 ‘0’과 ‘1’을 이었다. 벗겨진 피부 다루듯 뒷면에 정성껏 테이프를 붙이는 내 행동이  보는 이 없어도 구차하기만 했다.

오늘따라 녀석은 잠도 자지 않았다. 어둑한 거실에서 슬그머니 핸드폰을 켜 발표한 복권 숫자를 들여다봤다.


“당첨되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도대체 왜 복권을 사는지 이해가 안 돼.”

남편이 짜증스레 투덜댔다.


세상에는 두 부류가 있다. 복권을 사는 사람과 복권을 사지 않는 사람.

하지만 모두 당첨되기를 원한다. 잠시 후 우리는 아기를 재우고 침대 위에서 머리를 맞댔다. 세상이 고요하다. 온통 숫자뿐. 이럴 수가!


"혹시 지난 차수 맞춰본 거 아닐까?"

“당첨되는 숫자는 몰려있는 법이야. 자동으로 뽑으면 안 될 수밖에 없어.”

한 번도 복권을 산 적 없는 남편이 얄밉게 훈수를 다.

 

부풀대로 부풀다가 한순간에 꼬리를 잡아채고 도망가 버린 풍선 같은 복권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겨우 오천 원이라니!


사라져 버린 오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눈앞을 스쳐갔다. 쌀 이십 킬로, 사과 한 상자, 아기 옷 서너 벌, 부조,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담아 둔 책. 기껏 생각한다는 게… 마지막에 떠오른 게 그나마 조금 나아 보였다.


맛있게 외식하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할 수 있는데.




아파트 앞 포장마차에 풀빵을 사러 들렀다. 주인 부부는 청각 장애인이다. 거스름돈 대신 손으로 풀빵을 가리킨 건 순전히 포장마차 안의 공기가 유영하는 것 같은 분위기 탓이다. 건네받은 봉지가 푹 찢어졌다. 빵은 만 원어치 사는 사람이 드문 모양이다. 옮겨 담은 봉지 두 개를 들고 나오는데, 부부는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만원으로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을까.

오만 원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돈이다. 허망한 꿈을 쫒느라 제대로 쓸 곳에 못 썼다는 자괴감을 낳긴 했지만, 실상 그리 아깝지는 않았다.


밑져도 속았다는 느낌이 안 드는 건
이 세상 복권밖에 없더라.


최 운 시인의 '복권 한 장'이라는 시처럼.


며칠을 복권 때문에 꿈속에서 살았다. 무료한 일상이 식사 후 나오는 달콤한 디저트 같았다. 초콜릿과 설탕에 버무려 입에 넣는 순간 미소 짓게 하는 티라미슈. 상상이 날개를 펼쳤다. 어디에 쓸까 궁리했고, 비밀을 지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매주 복권을 사는 친구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가끔 일상도 달콤한 디저트가 필요한지 모른다.





<리더스에세이 2018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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