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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29. 2020

미역국

엄마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누나⋯.”

늦은 밤, 전화기에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린다.


술을 한 잔 마신 걸까?

혼자 사는 동생이 엄마를 모시게 된 게 벌써 몇 해째다. 엄마는 몇 주 전 침대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집에 가겠다고 난리를 쳐서 할 수 없이 동생이 집으로 모셔 갔다.

전화를 끊고나니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다. 많이 힘든가?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내일 내려 갈게.”

전화를 끊고나니 문득 다음 날이 내 생일이란 게 떠올랐다. 미역국이라도 끓여 놓고 갈까? 일어나 다시 부엌 불을 켰다.

딱딱하게 마른 미역이 손에 까칠하다. 물을 붓고 기다리니 미역은 천천히 물을 품으며 올올이 부드럽게 피어 올랐다.




작년 추석에 엄마는 많이 수척해 보였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저러다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갑자기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엄마는 아빠 선보고 만났겠네.”

“얼굴은 고사하고, 찻집에서 할아버지만 잠깐 만났다.”

엄마는 내게 상냥스러운 적이 별로 없다.


딸만 내리 셋을 낳자, 할아버지는 아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2 년 후 남동생이 태어나자 우리는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이란 걸 처음으로 찍었다. 뒷쪽에 언니 둘, 엄마 품에 안긴 동생 옆에 사내아이가 서 있다. 뒷머리를 바특하게 자르고 앞머리는 이마 위에 일자로 나란한, 반바지를 입고 서 있는 사내아이가 셋째 딸인 나다. 남자아이로 키워야 다음에 아들을 낳는다고들 했다.




두 분이 춤추던 날이 떠오른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두 분은 일본 말을 주고받으면서 신나게 춤을 췄다. 가끔 엄마 아빠는우리들이 들어서 안 되는 말은 일본 말로 했다. 주로, 오까네(돈), 오까상(어머니), 같은 말들. 듣다 보니 우리도 그뜻을 알게 되었지만. 거실에서 안방으로 밀고 당기고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데 눈이 따라가기 힘들었다.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면 네루다가 여인과 춤추는 장면이 나온다. 카메라는 여인의 허리를 휘감은 남자의 손을 클로즈업한다. 지그시 눌렀다 떼는 손. 몸의 언어. 화등잔만 해지는 마리오의 눈. 엄마도 영화 속 여인처럼 좋은 시절이 있었다.



영화 '일 포스티노'


심해에 잠긴 듯 풀어져 고요한 미역을 건진다. 참기름을 두르고 볶으니 미역이 다시 반짝이며 살아난다. 보글보글 끓는 국을 맛보며 한 숟갈, 두 숟갈 간장을 넣어본다. 맛이 제법 잘 어우러졌다. 엄마에게 미역국을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종일 눈이 내려서인지, 바람이 차가웠다. 방안엔 젖은 빨래가 한 가득이다. 동생이 엄마를 조심스레 일으키는데 옷이 젖어 있다. 부축해서 목욕탕으로 데려가는데 부득부득 밀어낸다. 혼자 씻겠다며.

엄마 몸은 이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다섯 아이를 배태했던 배는 불룩하게 쳐졌고 다리는 앙상한게 어디에 조금만 부딪쳐도 부서 같다. 오래 입어서 부들부들해진 낡은 내의 같은 몸이 친숙하기도 낯설기도 했다.


몇 년 전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한 적이 있다. 그 무렵 나는 예기치 않게 닥친 일로 몹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는데, 그날 엄마는 스치듯 한 마디 말을 툭 던져서 나를 놀라게 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몇 달 만에 만나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상태인데. 그날은 내가 엄마 뱃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엄마가 내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았다. 속을 낱낱이 들키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은 엄마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웬 미역국이냐고 물었다.


“오늘이 내 생일이잖아.”

“딸이 많아서 너희들 생일은 기억도 못 한다!”




후려치는 듯한 대답. 이제는 서운하지도 않다. 어쩌다 한 번 집에 가려고 전화하면 "뭐 하러 돈 쓰고 시간 쓰고 내려 오냐. 동생 와 있으니 됐다" 무 자르듯 하는 말에 신호음 울리는 전화기를 붙들고 울컥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끓인 미역국이네.”

동생이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잘 가져왔다. 동생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편치 않다. 혼자 씩씩하게 잘 살지만, 나이 들면 어떻게 할 건지. 건강 좀 챙기라 하면 별로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한다. 그럴 때면 고생을 너무 해서 그런가, 엄마 돌보느라 우울해서 그런가, 걱정이 된다.

동생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엄마가 간병인을 거부하는 일이다. 엄마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돈 건 한 달치 간병인 비용을 동생 통장에 넣어주겠다 말했을 때다.

간병인이 오면 무조건 고맙다는 말만 하고 잔소리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자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려고 눕는 뺨에 뽀뽀를 하자 엄마 콧구멍이 어쩐지 벙싯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생은 엄마를 믿지 않는다. 반신반의한다. 


지난번에 치매 심사를 받을 때 수 차례 동생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던 엄마는 엉뚱한 대답을 했으니.


“나, 지난 달 22일에 계모임 다녀왔어요.”

심사원들은 엄마가 날짜와 장소를 기억하고 혼자 다닐 수 있으니 더 물어볼 없다고 가버렸다.


“누나, 난 엄마가 정말 밉다.”

동생은 그날도 밤늦게 내게 전화했다.


엄마의 그런 반응이 나는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려는 생명력 같기도 하고 마지막 자존심 같기도 했다. 엄마는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엄마가 아닌 홀로 설 수 있는 한 존재라는 걸 말하려 했는지 모른다.


“누나, 내가 어릴 때 몸이 약하다고 엄마가 한약을 엄청 먹였어. 어딜 가든 이렇게.”

동생은 몸을 숙이고 양손을 모아 오목한 그릇을 만들어 누군가를 따라다니는 시늉을 했다.


“그래. 넌, 그때 엄마에게 코 꿰인 거야.”


안방에서 엄마가 돌아눕는지 끙 하는 신음이 들렸다.


<한국수필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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