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없다』 오강남, 현암사
우리는 이런 주장이 기독교의 보편적 믿음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런 근본주의적 입장은 주로 ‘미국에서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는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p28
우리를 주눅 들게 하고 거짓되게 하는 믿음 아닌 믿음을 믿음이라 붙들고 있어야 믿음이 있는 것으로 믿는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다. 믿음은 임금님의 비단옷이나 거기에 관련된 이론 체계나 의식 등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어떤 특정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일종의 마음가짐이요 신뢰와 귀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p38
사실 동정녀 탄생이라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문자 그대로 그렇게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희랍 화하기 시작하면서 처녀 탄생이 문자적인 의미로 그 중요성을 띠기 시작한다. 희랍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희랍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신의 아들로 믿기 원했고 그런 소원에 따라서 예수도 다른 신처럼 처녀 탄생을 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서 하느님의 임재, 성령을 체험했다. 이 놀라운 체험을 어떻게든지 의미 있게 표현하여 다른 사람도 그 체험자가 되기를 원했다. p206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나의 육체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이 된다. 나는 대체로 이런 판단을 내려버렸다.”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