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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24. 2021

그건 정말 안 믿어지는데?

『예수는 없다』 오강남, 현암사


책 반납일이 오늘로 다가와 대략 기억나는 것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읽은 지는 일주일이 지났는데 정리하려니 엄두가 안 나서 차일피일 미뤘다. 날씨가 더워서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선풍기를 갖다 놓고 의자에 앉은 건 책을 읽은 후 사라질 기억들을 잡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이 책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김영민 교수의 글 한 줄 때문에 이 책을 찾아서 읽었다. 내게도 놀라운 책이었다.


오래전 친구와 창세기에 등장하는 ‘우리’라는 말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 26)’


왜 ‘우리’란 말을 썼을까? 복수형으로 쓰는 게 당시의 존칭 습관이라는 말도 있고, 어느 수도회에서는 삼위일체 교리로 예수를 이 시기부터 있다고 여긴다는 말도 들었다.


누가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진실은 흐릿해 우리는 그 언저리를 맴돌며 짐작할 뿐이다. 성경은 필자를 알 수 없는 수 천 년 전의 기록 아닌가. 성경의 원 저자는 하느님,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의 말씀이란 말로 넘어갈 수도 있다. “알기 위해 믿고, 믿기 위해 알려고 한다”는 안셀모 성인의 말도 있지 않은가.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는 『예수는 없다』라는 거부감 주는 제목으로 우리를 깨워, 기독교를 뒤집어 읽어 보기를 권한다.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믿는 것이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가톨릭은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숨어서 믿던 교인들이 지상으로 나왔고, 교회는 부유해졌다. 하지만 ‘부유한 교회에 예수는 없다’ 말하기도 한다.  


“믿으면 천당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오늘도 기차역 광장이나 횡단보도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이들을 쉬이 볼 수 있다. 그러면 예수를 믿지 않는 불교도와 이슬람교도,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이들은 모두 지옥으로 가는가? 기독교는 이렇게 잔인한 종교인가?


저자는 성경 무오설, 동정녀 탄생, 기적, 육체 부활, 인간의 죄성, 대속, 예수의 재림과 심판 등을 무조건적으로 인정하고 의심 없이 믿어야 잘 믿는 것이고 그래야 참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라 말한다.


우리는 이런 주장이 기독교의 보편적 믿음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런 근본주의적 입장은 주로 ‘미국에서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는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p28


현재 미국에서 이런 근본주의자의 숫자는 대략 전체 기독교인의 20 내지 40퍼센트, 한국은 90 내지 95퍼센트라 한다. TV에 등장하는 전자 전도자들은 거의 근본주의자로 보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시각은 내게 무척 낯설었다. 지금까지 내가 믿었던 가톨릭의 4대 교리, 천주 존재, 상선벌악, 삼위일체, 강생 구속을 부정하는 걸로 보였으니까.


faith와 beliefs,  믿음과 믿고 있는 것.


우리는 누구나 자기 아버지에 대해  faith(믿음)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이나 처지에 따라 아버지를 beliefs(믿고 있는 것)이 다르다. 힘이 세서, 용돈을 잘 줘서, 자상해서, 아버지에 대해 다른  beliefs을 갖고 있다. 근본주의자의 교리는 일종의 특수 beliefs이다.


오랜 기간 이렇게 믿어온 이들의 믿음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수한 시대의 배경과 요구에 의해 형성된 이런 특수 교리가 여건이 바뀐 오늘에도  진리 자체라 여기는 게 문제라는 거다.


개신교든 가톨릭이든 이 책을 금서로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하지만 다섯 살 철수가 믿는 아빠와 스무 살 철수가 믿는 아빠가 다르듯, 종교 연령이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평생 영아기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도 안타까운 일 일듯 싶다.


우리를 주눅 들게 하고 거짓되게 하는 믿음 아닌 믿음을 믿음이라 붙들고 있어야 믿음이 있는 것으로 믿는 믿음은 참된 믿음일 수 없다. 믿음은 임금님의 비단옷이나 거기에 관련된 이론 체계나 의식 등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어떤 특정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믿음이란 근본적으로 일종의 마음가짐이요 신뢰와 귀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p38


저자는 기독교의 가르침 중 새로운 환경에 따라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쳐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그런 결함이 없었다는 무오설이나 그런 결함을 쉬쉬하며 호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라 한다. 성숙한 믿음은 우리에게 시원함과 툭트임을 가져다준다.




내 종교만 종교인가, 선악과, 이분법의 출현, 노아의 홍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자기 백성 밖에 모르는 하느님 (출애굽), 잔인한 하느님 (가나안 정복).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의 역사를 이해할 때 하느님이 그런 식으로 자기들을 도왔다고 믿는 바를 적어놓은 신앙 고백이다. 여기에 나타난 하느님은 이스라엘 부족이 가지고 있던 신관, 그 신관에 비친 하느님이다.


이기적 신관, 조건부 신관, 스스로 하느님이 된 사람들.

내 뜻을 하느님의 뜻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신들의 전쟁이 벌어진다.  


그러면 하느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무리 교리를 뒤져도 거기에 하느님의 뜻은 나오지 않는다. 방법은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 내가 죽고 우리 사이에 평화가 깃들면 그것이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이어진다. 우리는 이 일을 문자적 역사적 이야기로 읽고 있지는 않은가. 역사적으로 바라보면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데.


초기 교회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역사적일 이유가 없었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와 확신을 이렇게 표현할 뿐이었다. 이런 이야기로 믿음이 생기는 게 아니라 그들의 믿음으로 이런 이야기가 생겨났다. 자자는 동정녀 탄생설도 마찬가지로 본다.


사실 동정녀 탄생이라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문자 그대로 그렇게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희랍 화하기 시작하면서 처녀 탄생이 문자적인 의미로 그 중요성을 띠기 시작한다. 희랍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희랍 고대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신의 아들로 믿기 원했고 그런 소원에 따라서 예수도 다른 신처럼 처녀 탄생을 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서 하느님의 임재, 성령을 체험했다. 이 놀라운 체험을 어떻게든지 의미 있게 표현하여 다른 사람도 그 체험자가 되기를 원했다. p206


오래전, 세례식 전날까지 내게 "그건 정말 안 믿어지는데요?" 예수의 동정녀 탄생설을 반신반의하던 어느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나는 어떻게 대답했던가.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믿음을 강요하진 않았을까? 아니,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게 신앙이라고 현학적인 말로 얼버무리진 않았을까?


성경이 진리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적으로 진리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는 말을 그때 알았더라면….


책의 후반부에 다석 류영모와 함석헌 옹의 신앙 간증이 실려 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나의 육체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이 된다. 나는 대체로 이런 판단을 내려버렸다.” 함석헌,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서』


1998년 세례를 받았으니 가톨릭 신자로 23년을 살았다. 그간 한결같이 믿음을 유지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열심히 믿었던 시간, 남 몰라라 하던 시간이 모여서 오늘이 되었다. 정치인처럼 종교 지도자들도 마음에 들지 않는 때가 있지만, 최근 들어서는 내가 가톨릭을 믿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갈림길에서 중요한 선택을 고민할 때 늘 맑은 마음을 선물로 주셔서 후회없는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내 신앙의 보답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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