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뤽상부르 가든, 런던 하이드파크, 세비야 광장
최근에 신도시로 개발 중인 지역으로 이사 왔다. 우리 집에는 활동량이 많고 예민한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공원이 주변에 마땅치 않다. 지도를 아무리 넓게 봐도 도보 거리에 공원이 없다. 내가 한국에 왔음이 가장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면허가 없다. 내 모든 여행은 말 그대로 '걸어서 세계 속으로'였다. 교통비가 비싼 나라에서는 더더욱 많이 걸었고, 소도시에서는 무조건 걸었다. 그렇다 보니 일정 중간중간에 만나는 공원은 소중한 안식처였고, 현지인들의 피크닉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 즐거움을 가장 처음 알게 해 준 도시는 런던이었다. 런던에 몇 년 동안 거주해도 3존 내에 있는 모든 공원에 다 가보기 어려울 정도로 공원이 많다. 다른 도시와 비교해봐도 확실히 많다.
모두가 자전거를 타고 다닐 만큼 넓은 하이드파크, 버킹엄 궁전 일대의 장관을 이루는 생제임스파크와 그린파크, 셜록홈스의 집 바로 근처에 있는 리젠츠 파크, 사진 찍기 좋은 프림로즈 힐, 일반 공원보다 훨씬 넓은 햄스테드 히스, 런던의 고층 빌딩을 내려다볼 수 있는 그리니치파크, 그리고 내가 살았던 동네의 공원까지.
바로 기억이 나는 곳만 적어도 이 정도이다.
런더너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조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생활 스포츠 교육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겠지만 공원의 역할도 크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처럼 차를 타야 공원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집 밖을 나서면 어디든 공원이 있기 때문이다. 락다운 티어 4(필수 상점 이외는 모두 문을 닫은 상태)에도 공원에 가면 온 동네 사람들과 반려견들이 산책을 하거나 힘차게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농구, 축구, 보드, 요가 등 코로나가 심각한 상황에 칭찬할 만한 행동은 아니다만, 그 정도로 생활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공원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 곳은 파리의 뤽상부르 가든이다. 이제껏 방문해본 공원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을 뽑으라면 바로 이 곳을 말한다. 그 정도로 조경이 예뻤고, 공들여 가꾼 티가 났다. 주변 건축물이 풍경을 만든다거나 특별한 조형물을 설치해서가 아니라 이 공원 자체가 매우 아름답다. 파리의 공원에는 곳곳에 초록색 의자가 있는데, 채도 낮은 초록색이 아주 취향저격이었다.
파리 공원의 분위기가 다른 도시와 다른 이유는 꽃만이 아니다. 이 형용하기 힘든 장관을 스케치하는 사람들과 독서를 하는 파리지앵들이 많이 모인다. 예술적 사고가 끊임없이 탄생하는 곳은 역시 자연 속인가 보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당한 인종차별과 언어적 한계에서 오는 답답함이 내게 트라우마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와 도시들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의 조상이 남긴 놀라운 문화유산과 축복받은 자연 때문이다.
세비야는 수업이 없는 주말에 가서 1박만 머문 도시다. 다시 가고 싶은 도시 3개를 고르라면 들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여행의 기본 중에 기본인 날씨, 음식, 사람들 삼박자가 완벽했기 때문이다. 워낙 작은 도시이기도 하고 오랜만에 계획 없는 여행이 하고 싶어서 마음 가는 곳에 들러 밥을 먹고, 눈 앞에 보이는 곳을 구경하면서 다녔다. 그렇게 마지막 일정으로 우연히 들른 곳이 세비야 광장이었다.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사람도 많지 않아 바닥이나 난간 위에 올려놓고 혼자 찍었다. 늦여름 밤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한적한 세비야 광장을 걷는데, 반짝이는 바닥의 타일도 예뻤고 둥둥 떠있는 보트도 귀여워 보였다. 성수기의 유명한 관광지는 인파 속에 떠밀려 정신없기 마련인데 운 좋게 조용한 세비야 광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낮의 세비야 광장도 궁금해서 가봤는데 사람도 많고 음식과 기념품을 파는 매대도 많아서 정말 복잡했다. 원래 예상했던 그 모습이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놀이터와 공원도 좋지만, 강아지들과 함께 산책할 수 있는 동네 공원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겐 편(의점)세권 만큼 중요한 공세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