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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갈색머리 Dec 14. 2016

이별의 기록 3

혼자 하는 이별




9. 



<이별의 기록 2>


너무도 간편하게 그는 나와 이별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문장은 간결했다. 이렇다 저렇다 하는 설명도 필요 없었다. 그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묻는 질문도 없었다. 정말, 그냥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잠을 잤다. 정말 많이 잤다. 하는 일이라도 바빴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필 일이 없을 때였다. 긴 잠에서 깨면 침대에서 꾸물거리다가 일어나서 거실로 나왔다. 내가 좋아하고 그도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그가 온도를 맞춰 내려주던 차 한잔을 내려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창 밖을 바라보며 그를 생각하며 차를 마셨다. 입맛이 없어서 끼니를 걸렀다.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속을 달래주고 생각을 비워주는 차 한잔으로 끼니를 대신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이런저런 생각을 따라가다가, 문득 정신이 들면 손에 잡히는 책을 아무거나 하나 집어 읽었다. 친구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한심해하는 눈빛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읽으라며 빌려준 <너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와 <자존감 수업> 등의 책들이 네댓 권 집안 이곳저곳에 놓여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의 생각에 집중이 안되면 글을 썼다. 




'밀어내도 듬직하게 다가오는 네 모습에 너를 사랑하게 됐어.'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를 원망했다.


'너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좋았어. 너의 눈빛이 나는 너무 좋았어.'

나는 내가 사랑했던 그를 그리워했다.


'내가 그렇게 힘들게 헤어지자고 말을 꺼냈을 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나는 이기적인 그를 미워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내가 달라지면 다시 너와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미련은 점점 커지고 나는 기적을 꿈꿨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들은 그들 눈에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심심해 보이는 나를 불러내서 저녁을 챙겨주고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여 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주었다. 아, 착하기만 하고 눈치도 없는 나의 친구들은 나와 그의 연애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모든 일이 지나고 우리가 헤어지고 나니, 너 걔랑 잘 어울리는데 한번 만나봐, 라며 저들끼리 신나서 계획을 세웠다. 나는 그 곁에 무릎을 안고 앉아서 어이없이 웃기만 했다. 


작은 동네, 같은 모임, 공통된 친구들은 이별 후의 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나는 어딜 가나 그의 이름을 들었고, 모임에 나가면 그를 먼발치에서 마주쳤다. 나는 그와 눈인사를 나누면서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했다. 만약 지금 내 앞에 거울이 있다면 내 표정이 참 볼만하겠다,라고 생각했다. 그와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할 말이 뭐가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었을까. 하고 싶은 말이 뭐였을까.


표출되지 못한 마음은 내 안에서 꾸역꾸역 제 몸집을 불렸다. 생각은 머릿속에서 얽히고설켜 나조차 얽힌 실타래의 끝을 찾지 못했다. 나는 내 안에서 떠도는 그의 생각과, 주변에서 마주치는 그의 소식으로부터의 도망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곧바로 나는 가족이 있는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바로 며칠 후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로 하고 주변에 그 소식을 전했다. 내 소식이 금방 그에게 닿았나 보다. 그에게서 연락이 와서, 갑자기 한국은 왜가?,라고 물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너 피해서 도망가는 거잖아.' 


비행기 타기 전날 밤,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몇 시간을 고민하다가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통화할 수 있어?' 늦은 밤, 그와 영상통화를 했다. 나는 여전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몰랐지만 전화기를 붙들고 그냥 생각이 나는 대로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나는 하루 종일 네 생각밖에 안나. 오늘 친구들이랑 저녁을 먹는데 네 생각이 났어. 어제 쇼핑을 갔는데 네 생각이 났어.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했어.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그냥 이런 말을 너무 하고 싶었어.' 한 시간을 쉬지 않고 말했던 것 같다.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조용히 작은 화면 속 그의 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오랜만에 보는 편안한 그의 얼굴이 내 눈에 참 예뻤다. 뭘 봐?, 라길래, 잘생겨서,라고 대답하니 그가 피식 웃었다. 너도 예쁘네,라고 대꾸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라고 물었다. 내가, 응, 좀 속 시원한 거 같아, 들어줘서 고마워,라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었다. 




몇 시간 후 나는 비행기를 탔다. 




아, 물론 한국에 와서도 나는 구질구질하게 질척였다.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아빠와 좋아하는 와인을 한잔 마시고서도, 나는 혼자 방 문을 닫고 이불속에 들어가면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는 내 연락을 받아주면서 그냥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반복했다. 한국에 와서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도 그의 생각은 매일, 매 시간, 매 초,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꽈리를 틀고 앉았다. 육체적인 거리는 지긋지긋한 미련을 정리하는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듯싶었다. 단지, 정말 다행히, 그가 존재하는 공간과 내가 존재하는 공간의 시간의 차이는 즉각적인 소통을 불가하게 했다. 내가 그에게 연락하고 싶어도 그는 자고 있을 시간이거나, 공부를 하고 있을 시간이거나, 친구들과 같이 있을 시간이었고, 또 그에게 답장이 와도 나는 자고 있었거나, 외출을 했거나, 가족들과 밥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스스로를 그로부터 격리시키고 혼자 열심히 이별을 겪었다. 그가 생각이 나면 혼자 그를 생각했고, 그가 보고 싶으면 혼자 그를 보고 싶어 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 날짜가 어느덧 코앞이던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그가 보고 싶었다.


몰랐는데, 생각해보니까 보고 싶었다.


어느새 생각 안 하고 있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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